'피터팬 증후군' 유도하는 갈라파고스 규제, 대기업 집단 지정 제도
▪ 기준 상향, GDP 대비 자산규모 등 법 개선 이뤄지고 있으나 근본적 한계는 여전
▪ 중소기업에서 중견기업, 대기업으로 커질 때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규제에 '기피' 만연
▪ 유사한 경제구조의 일본도 사실상 폐지...원점에서 폐지 검토가 필요한 시점
■ 들어가며
'대기업’이라는 표현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다. 흔히 '재벌 기업’이라는 표현과 혼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대기업의 정확한 규모, 유형, 사업 범위를 규정하는 경우는 세계적으로 흔치 않다. 주로는 공정한 경쟁 촉진을 위해 보호 대상으로서 중소기업을 규정하고, 그 외의 기업을 대기업으로 분류하는 방식이 더 보편적이다. 영어로 대기업을 'Conglomerate Company’라고 하나, 엄밀히 말해 그 뜻은 '복합 기업’이다. 다양한 업종의 회사가 연합한 거대 기업체를 의미한다. 물론, 국내 대기업과 그 성격은 유사하다. 그럼에도 단순히 '큰 회사’를 일컫는 것은 아니다.
한편, 한국에는 객관적으로 규정된 대기업이 법령상 존재한다. 정확한 명칭은 '대규모 기업 집단’(이하 '대기업 집단’)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매년 대기업집단을 지정하여 발표한다. 종류는 두 가지다. 공시대상기업집단과 상호출자제한집단이다. 이유로는 경제력 집중 억제를 내걸고 있다.
대기업 집단에 속하는 것은 중소·중견 기업 입장에서 영광스러운 성공의 증표일까? 적어도 국내에서는 대기업 집단 편입은 기피의 대상이자 공포스러운 변화다. 웬만해서는 대기업보다는 중견기업, 중견기업보다는 중소기업에 머물고 싶어한다. '피터팬 증후군’이라고도 불린다. 기업은 태생적으로 성장과 확장을 지향한다. 그렇다면 왜 대기업 집단의 명예를 스스로 거부하는 것일까? 이것이 22대 국회에서 대기업 집단 지정제도 폐지를 고민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다.
■ 현행 제도의 문제점
1987년 전두환 정부 당시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이하 '공정거래법’)에 최초 도입된 대기업 집단 지정 제도는 35년의 경제 성장과 함께 변천해왔다. 도입 당시 기준은 자산 4,000억 원 이상으로 삼성 등 32개 기업이 지정됐다.
이후 재계 자산 순위 1위부터 30위 기업을 지정 대상으로 기준을 변경하기도 했고, 2000년대 들어서 다시 자산 총액으로 기준을 바꿨다. 2조 원에서 5조 원, 다시 10조 원으로 점차 기준은 상승했다. 경제 규모가 커지고 글로벌 다국적 기업이 많아진 점이 반영된 것이다. 현행 법령을 통해 그 내용을 살펴보자.
법령상에서는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 판단 기준을 국내총생산의 0.5% 이상의 자산을 보유한 기업으로 보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매년 4월 경에 대기업 집단을 지정, 발표하는 점을 고려했을 때 이 규정이 적용되는 것은 2024년부터다. 2021년 기준 한국의 명목 GDP는 잠정 2,072조 원을 기록해, 이의 0.5%는 현행 적용 기준인 10조 원과 맞아 떨어진다. 이처럼 절대 자산 규모가 아닌 국내총생산 대비 비율로 기준을 변경한 것은, 매번 한국의 경제 규모가 커질 때마다 법개정을 통해 자산 총액 기준을
올려야 하는 번거로움을 해소하기 위한 것으로, 긍정적인 입법 사례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대기업 집단 지정 제도의 필요성, 실효성, 적절성을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 이유를 몇 가지 살펴보도록 하자
1) 개방 경제 시대에서 국내 기업의 독점 우려, 과연 바람직한가?
대기업 집단 지정 제도가 도입된 취지는, 대기업의 과도한 사업 확대와 규모 증가로 과도한 시장 지배력을 누리고 독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어 이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대기업 집단에 속한 주요 기업의 매출 대부분이 해외에서 발생하고 있어서 국내 시장 독점과는 다소 무관한 것이 현실이다. <아시아경제>가 2022년 시가총액 1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해외 매출의 비중은 평균 52.5%를 기록했고, 해외매출이 90% 이상인 기업은 9곳으로 밝혀졌다.
삼성전자는 총매출의 83.9%를 해외에서 벌어들였고, 현대자동차의 해외매출 비중은 68.6%로 나타났다. 기아(71.7%), LG전자(60.1%), SK하이닉스(97.3%)도 해외 매출 비중이 높다.
한국경제인협회(전국경제인연합회)는 한국의 연대별 경제 개방도가 1980년대 당시 65.6%에서 2010년대 91.5%로 늘어나는 등, 외국 기업의 한국 시장 진입이 자유롭기 때문에 더 이상 폐쇄경제를 가정한 대기업 집단 별도 규제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2) 한국에만 존재하는 '갈라파고스’ 규제, 국내기업의 글로벌 경쟁력 약화
전 세계적으로 대기업 집단 지정 제도가 존재하는 국가는 한국 뿐이다. 기업의 규모가 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수많은 규제를 추가로 적용하는 것은 역차별이라는 목소리가 꾸준히 나온다.
앞서 대기업 집단 지정 제도를 운용한 일본의 경우만하더라도 1997년 사업 지배력이 과도하게 집중되는 경우를 제외하고 순수 지주회사의 설립 및 전환을 자유화하였고, 2002년에는 출자총액제한제도를 폐지해 사실상 대기업 집단 지정 제도를 폐지한 상태다.
다국적 글로벌 기업 대비 경쟁력을 약화시킨다는 지적도 있다. 2016년 '한국경제연구원’에서 개최한 <대규모 기업 집단 지정제도, 무엇이 문제인가> 특별 좌담회에 참석한 한 기업인은 “혁신산업 분야의 경쟁자들인 해외 다국적 기업들은 이러한 규제를 받지 않기 때문에 국내 기업에 비해 글로벌 시장확보가 수월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또 다른 기업인은 “FTA 협정 체결의 실질적 효과는 단순한 관세철폐가 아니라 양국 간 규제수준을 동일한 수준으로 맞추는 데 있기 때문에 상대국 수준으로 우리의 규제를 낮춰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컨대 국내에 진출한 해외 글로벌 기업은 대기업 집단 지정 제도에 따른 규제로부터 자유로운 반면, 국내 대기업은 그렇지 않으므로 국내시장에서 오히려 불리한 대우를 받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 기존 입법 논의 및 대안
대기업 집단 지정 제도와 관련해 국회에서 시도된 입법 움직임은 주로 대기업 집단 기준을 보다 완화하는 방향 위주였다. 몇 가지 상징성 있는 입법 시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재계를 대표하는 경제단체 전국경제인연합회는 2021년 4월 28일, 정부를 상대로 대기업 집단 지정제도의 폐지를 제안했다.
당시에는 유통기업 '쿠팡’의 대기업 집단 지정 논란이 한창 불거진 시기였다. 자산 규모가 5조 원을 넘으면서 공시대상기업집단으로 분류된 것이다. 문제는 '동일인’, 즉 총수의 지정이었다. 사실상 총수 지위를 갖고 있는 김범석 이사회 의장이 미국 국적이므로 동일인으로 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공정위는 쿠팡을 '총수 없는 대기업 집단’으로 지정했다. 이 자체만으로도 국내법과 글로벌 기업의 현주소 간에 얼마나 큰 괴리가 있는지 보여줬고, 한경협은 이 참에 대기업 집단 지정 제도를 전면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한경협은 “과도한 규제가 신산업 발굴을 위한 벤처기업, 유망 중소기업의 M&A 등을 저해하고 있다. 이들은 규모가 작아도 대기업집단에 편입되면 대기업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각종 지원제도에서 배제되며, 계열사의 지원도 일감몰아주기, 부당지원행위 때문에 불가능하다. 쿠팡이 최근 뉴욕 증권거래소에 상장한 것도 이러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비판했다.
매년 4월 공정위의 대기업 집단 지정 발표는 늘 주목을 끄는 뉴스다. 2023년 4월 기준으로 공정위는 총 82개 기업집단을 공시대상 기업집단으로 지정했다. 전년 도 대비 6개 집단이 증가했다.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은 전년 대비 1곳 증가한 48곳으로 집계됐다.
앞서 언급한 '피터팬 증후군’은 이미 기업계에서 오래된 현상이다. 한경협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중소기업에서 중견기업으로 성장하면 추가로 126개의 규제가 적용되고, 공시대상 기업집단으로 지정되면 총 적용 규제 숫자는 274개로 늘어난다. 10조 원 이상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은 최대 342개의 규제를 적용 받게 된다. 대한상공회의소가 2023년 1월 발표한 <중견기업의 경영실태 및 시사점 조사>에서는, 조사에 응답한 기업의 77%가 “중소기업 졸업 후 지원축소와 규제강화 등 새롭게 적용받게 된 정책변화에 대해 체감하고 있거나 체감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국민의힘 소속 윤창현 의원은 2022년 8월 <공정거래법상 기업집단 지정제도 30년, 이대로 괜찮은가> 기업 세미나를 개최, “글로벌 시장에서 국가 간 경계가 점차 사라져가고 끊임없는 기술 혁신으로 새로운 형태의 서비스와 산업이 등장하는 현시점에, 과거 경제 개방도가 낮아 일부 기업의 시장독점이 가능했던 시절의 규제를 그대로 적용해도 될지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대기업 집단 지정 제도를 즉각적으로 폐지하는 것은 당연히 정치사회적으로 큰 부담이 있다. 마치 대기업을 편드는 듯한 인식을 심어줄 소지가 충분하다.
다만, 대기업 집단 지정제라는 제도의 틀이 존속되는 한, 당국의 입장 변화와 포퓰리즘적 정치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대기업을 타겟으로 한 신규 규제를 생산해낼 가능성은 원천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윤창현 의원이 지적한 대로 '근본적 재검토’가 필요하다. 22대 국회는 한국의 기업 성장 유인을 떨어뜨리고 글로벌 기업에 역차별로 작용하는 대기업 집단 지정 제도의 폐지를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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