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곡물법 이야기
곡물의 수출과 수입에 관한 정부의 개입은 섬나라 영국에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로 얘기하는 곡물법은 1815년에 개정된 신곡물법이지만 사실 영국은 1660년과 1815년 두차례의 곡물법 발효가 있었습니다.
1660년 곡물법으로 농산물 생산자를 보호하기 위해 농산물 수출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수입 농산물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면서 영국은 1660~1765년까지는 대체로 곡물 수출국의 자리를 유지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나폴레옹 전쟁(1797~1815)이후 전쟁기간 높게 유지되었던 농산물 가격이 급격히 하락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로 인해 1815년 곡물법 개정을 통해 밀이 일정가격 이하일때엔 수입을 금지하는 조처까지 취하게 됩니다.
문제는 1800년 이후 인구증가와 경제성장이 농산물 보호에 불리한 방향으로 전개된 것입니다.
급기야 영국에 최초의 전국 단위 정치 압력 단체인 곡물법 반대 동맹(ACLL)이 생겨 자유무역을 주장하며 보호주의에 의해 유지되는 높은 곡물가격이 지주 귀족 계급만을 배불린다고 주장했습니다.
곡물법 철폐의 가장 큰 걸림돌은 정부의 재정수입 구조였습니다. 영국은 1842년에 최초로 소득세를 부과했지만, 1846년에도 여전히 재정수입의 38%를 관세에 의존하고 나머지 대부분을 토지세에 의존하는 세수구조였습니다. 토지소유자인 지주계급의 수입을 줄이는 조처는 정부 운영에 지장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습니다.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경제제도가 통합되어 1820년대에 아일랜드 가내수공업자들을 보호하던 관세제도마저 폐지되면서 아일랜드의 여타 산업은 몰락하고 더욱더 농업에 올인하는 경제구조가 되어갔습니다.
영국 정부가 굳게 지킨 자유방임주의 정책에서 유일한 딱 하나의 예외인 곡물법은 그렇게 위기를 키워갔습니다.
3. 감자 흉년은 어디에나 있었다
감자는 아일랜드 뿐 아니라 어디에서도 가난한 자들의 양식이었습니다. 작은 땅에서 거둘 수 있는 영양가 높은 식량으로는 감자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농민들에게 감자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작물이었습니다. 감자껍질과 남는 감자는 집안에서 키우는 돼지와 닭에게 먹였습니다. 오두막 바깥에 쌓이는 분뇨는 밭을 비옥하게 만드는 비료가 되었습니다.
감자가 가난한 농민들에게 중요한 식량이었던 것은 아일랜드만이 아니었습니다. 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였고 감자마름병에 의한 감자흉년은 다른 나라에서도 발생했습니다. 그로 인한 대량 사망이 발생한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일랜드처럼 민족단위의 거대한 재앙으로 확대되지는 않았을 뿐입니다.
달랐던 점은, 아일랜드처럼 지주계급과 농민계급이 민족적으로 분리된 곳도 없었다는 점, 한 나라 안에 그런 농업구조가 그처럼 과도하게 자리잡지는 않았다는 점, 국내산 곡물 수출을 금지하는데 역점을 둔 농산물 관련법은 있었을 지언정 영국처럼 수입을 막는데 역점을 둔 곡물법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4.개혁을 막은 불신의 벽
인클로저 운동과 4윤작 노포크농법이 아일랜드에 시도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가축의 가격이 상승하고 1820년대 들어 잉글랜드와 아일랜드를 오가는 빠른 증기선이 도입되면서 지주와 땅이 넉넉한 농민들은 농지를 목초지로 전환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가축들 때문에 쫓겨날 농업노동자들과 소작농들의 광범위하고 격렬한 저항은 그런 개혁의 도입을 막았습니다. 민족의 구성이 신분적으로 크게 갈려있는 사회구조는 서로간의 깊은 불신을 초래했고, 이는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도입되는 개혁의 추진을 가로막았습니다. 이후 감자흉년이 벌어진 뒤에도 오랜 불신의 벽과 함께 대부분의 지주가 잉글랜드에 거주 중인 상황으로 인해 현지상황 파악과 대처도 늦어지게 만드는 요인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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