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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반도체 이야기 3편, 한국 반도체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에 반도체 공장이라는 것이 처음 들어온 것은 1965년입니다. 미국의 코미전자가 구미에 반도체 조립공장을 지었습니다. 반도체 공정은 설계, 웨이퍼 가공, 조립의 순으로 이뤄지는데요. 한국에 들어온 것은 가공된 웨이퍼 칩에 전선을 달고 케이스에 넣는 일이었습니다. 한국 여공들이 그 일을 잘했나 봅니다. 뒤이어 페어차일드, 모토로라, 시그네틱스 같은 미국 반도체 기업들이 한국에 공장을 세웠습니다. 그 당시 미국 반도체 조립의 대부분을 한국의 여공들이 담당했다고 합니다.
반도체 발명자인 쇼클리가 마운틴뷰에 연구소를 만든 해가 1955년입니다. 거기에서 뛰쳐나온 8인의 배신자들이 페어차일드 반도체를 만들어 첫 제품을 출하한 것이 1957년. 그 때부터 그 일대가 반도체 벤처기업들의 성지가 되고 나중에 실리콘 밸리라고 불리게 됩니다. 그 무렵 한국은 반도체 조립 노동력으로 그 흐름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당시 대부분 반도체 기업은 외국 합작 또는 직접투자 기업이었는데 아남산업 하나만 순수한 한국 기업이었습니다.
1960년대 한국의 반도체가 조립 위주였다면 1970년대에 들어서는 집적 회로의 가공으로 수준이 높아집니다. 첫 테이프를 끊은 주역은 강기동 박사입니다. 일찍이 미국 유학을 가서 반도체를 전공했고 1962년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곧바로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에 들어가 많은 업적을 이뤄내죠. 1973년 미국에서 ICII라는 반도체 회사를 세우고 투자를 모집해서 한국 부천에 가공 공장을 설립합니다. 전자시계를 만들어 팔려던 계획이었는데 오일쇼크가 터져서 자금 공급이 다 끊겨버렸습니다. 1974년 결국 삼성의 이건희 당시 동양방송 이사가 인수를 하게 되죠. 그러니까 삼성의 컴퓨터 사업은 1974년에 시작된 셈입니다.
1977년에는 대한전선이 반도체 사업부를 만들었습니다. LG전자가 된 금성사도 1979년 미국 IBM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민병준 박사를 영입해서 반도체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1970년대에 반도체 제조가 시작되기는 했지만 그 규모는 미미했습니다. 경제의 주력은 건설, 조선, 철강, 자동차, 석유화학, 가전산업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반도체가 중요한 산업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부터였습니다. 삼성, 현대, LG 등 대기업들이 반도체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던 겁니다. 일본 기업들이 반도체로 눈부신 성공을 거두던 시기였습니다. 한국 기업인들은 일본이 하면 한국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강했었습니다.
삼성의 이병철 회장도 반도체에 뛰어 들었습니다. 후계자인 이건희가 한국 반도체를 인수할 때 별로 탐탁치 않게 여겼던 그였습니다. 그런데 NEC, 히타치, 도시바 등 일본 기업들이 반도체로 성공을 거두게 되었으니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더욱 결정적 계기는 1982년 3월 미국 실리콘 밸리 방문이었습니다. 미국 동부의 보스턴 대학으로 명예박사 학위를 받으러 가게 되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실리콘 밸리를 들리게 되었습니다. 컴퓨터 기업인 휴렛패커드 사무실에서 사람들이 종이와 펜이 아니라 개인용 컴퓨터로 일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귀국하자마자 부하에게 반도체사업 기획안 작성을 지시합니다. 그리고 일본 기업들의 사례를 자세히 살핀 끝에 1983년 2월 동경에서 삼성의 반도체 산업 투자를 선언하게 됩니다. 삼성의 본격적 반도체 투자가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그 소식을 듣고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이병철 회장을 찾아와서 삼성 반도체를 구매하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합니다.1 1984년 5월 삼성전자 기흥공장은 완공됐고, 삼성은 그해부터 애플 컴퓨터에 64K 디램을 공급했습니다.
현대의 정주영 회장도 비슷한 시기에 현대전자를 설립하고 반도체 투자에 착수합니다. 1981년 마쓰시타 전기의 마쓰시타 고노스케 회장과 전두환 대통령의 권유가 결심을 굳히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2 결심을 굳힌 정주영은 미국에 있는 강기동 박사에게 사업계획서를 의뢰합니다. 그리고 1982년 11월 상공부에 사업계획서를 접수했습니다. 이병철 회장의 동경선언이 있기 3개월 전입니다.
이병철과 정주영 사이의 경쟁관계가 삼성, 현대 두 그룹의 반도체 투자를 촉진했을 수 있습니다. 이 무렵 이병철과 정주영은 서로 감정이 무척 안 좋았습니다. 현대가 갑자기 너무 커진 것이 큰 이유였습니다. 현대는 1975년 30만톤급 대형 유조선 건조에 성공하고 연이어 1976년에는 당시 정부 예산의 1/3에 달할 정도로 엄청난 금액의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산업항 공사를 멋지게 성공시켰습니다. 그 덕분에 현대는 삼성을 누르고 재계 랭킹 1위가 되었고 세계 100대기업 안에도 들게 되었습니다. 이병철 회장의 입장에서는 정주영은 그저 그런 건설업자에 불과했는데 어쩌다 보니 자기가 오히려 뒤쳐진 것입니다. 1977년 정주영은 전경련 회장까지 되었습니다. 속이 상할 만도 하죠. 특히 정회장과 박정희 대통령 사이가 좋은 것이 꼴 보기 싫었을 겁니다. 사카린 사건 이후 이병철 회장은 박대통령을 아주 싫어하게 되었거든요. 정주영도 이병철에 대해서 상당한 라이벌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삼성과 현대는 서로 비난성명전까지 벌릴 정도로 감정이 안 좋았던 시기입니다.
그런데 정주영이 반도체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 든다고 하니 이병철의 입장에서는 경쟁의식이 생길 수 있었을 겁니다. 물론 감정에 휘둘려 사업을 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인간인데 감정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겠지요. 아무튼 현대가 정부에 사업계획서를 접수한 3개월 뒤 이병철의 동경선언이 이루어졌습니다.
한편 정주영 회장은 강박사에게 현대전자의 사장을 맡아 달라고 했지만 강박사가 고사를 했고 결국 정주영 회장이 직접 현대전자 사장이 되어 사업을 시작합니다. 강기동 박사는 삼성과 현대 모두의 반도체 사업의 시작에 결정적 기여를 한 분입니다. 그의 회고록3에 따르면 강박사는 일곱개의 기업을 위해서 반도체 사업계획을 수립했습니다. 삼성에 인수된 한국반도체와 현대전자뿐 아니라 쌍용그룹, 코오롱그룹, 한국화약그룹도 강박사가 사업계획서를 만들어준 기업의 리스트에 들어있습니다. LG, 즉 금성사는 1979년 미국 IBM에서 중책을 맡고 있던 민병준 박사를 영입해서 반도체 사업을 시작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반도체 사업을 시작했지만 두각을 나타낸 것은 삼성입니다. 64K 디램에 이어 256K 디램으로 승승장구했습니다. 현대전자는 출발부터 쉽지 않았습니다. 개발 허가 문제로 시간을 지체했습니다. 디램 대신 SRAM을 사업 아이템으로 선택했는데 제품 생산에는 성공했는데 구매자를 찾지 못했습니다. 결국 뒤늦게 디램으로 전환했지만 고배를 마십니다. 1986년이 되어서야 디램 제품 생산에 성공하게 됩니다. 금성사 역시 삼성에 비해서 그리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합니다. 민병준 박사의 회고에 따르면 1985년부터 금성의 투자가 줄어들었고 1988년에는 반도체 관련 투자가 거의 사라져 버렸다고 합니다.
10년 정도 지난 1995년 상황을 보면 분명한 차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삼성의 디램 매출액은 64억 달러로서 NEC, 히타치를 누르고 세계 정상에 올랐습니다. 사실 세계 1위는 1992년에 달성했습니다. 현대전자는 35억 달러, LG는 30억 달러로 삼성의 절반 정도 수준입니다.
삼성전자의 성공 요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과감한 투자일 것입니다. 1985년과 1986년 두 해의 투자를 보면 삼성이 합계 3,900억원인데 금성은 1,900억, 현대는 1,700억입니다. 금성, 현대 모두 삼성의 절반에도 못미치죠. R&D 투자는 더 합니다. 삼성이 780억인데 금성은 37억, 현대가 280억원입니다.
IBM에서 반도체를 담당하다가 금성사로 옮겨 반도체 사업을 총괄했던 민병준 박사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4
“1985년 5인치 웨이퍼 MOS공정을 건설하며 300억원을 추가 투자 요청했으나 구자경 회장이 100억원만 승인했다. 삼성 이병철 회장은 강진구 사장이 요청한 것 이상으로 3천억원 투자를 승인했다. … 삼성과 금성의 격차는 크게 벌어졌다. 재미교포 박사 12명을 초빙해서 유리한 상황이었으나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훗날 역전 당하고 말았다. 1987년부터는 금성반도체가 위축되고 … 1988년부터는 … 삼성이 월등히 앞서 가게 되었다.”
디램 반도체의 원가를 낮추려면 막대한 설비 투자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투자 규모가 커질수록 위험도 커집니다. 불황이 닥쳐 가격이 떨어지면 투자해 놓은 설비가 수렁이 될 수 있습니다. 삼성은 처음부터 과감히 베팅을 했고 위험이 닥쳤을 때도 슬기롭게 견뎌 냈습니다. 그 덕분에 결국 끝까지 살아 남아 메모리 세계 최고가 된 것이죠.
삼성이 경쟁사들을 앞지른 또 다른 계기는 제조 방식에서 트렌치가 아니라 스택 방식을 선택한 것입니다. 디램의 집적도를 높이기 위해 처음에는 평면적으로 촘촘히 선을 배치하면 됐습니다. 하지만 회로의 집적도가 4M 디램으로 높아지면서부터는 평면이 아니라 입체적 배치가 필요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위로 쌓아 올릴 수도 있고 밑으로 파고 들어가면서 선을 쌓을 수도 있는데요. 쌓은 것이 스택이고 파고 들어가는 것이 트렌치 방식입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는지에 따라 회사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을 정도로 큰 결정이어서 결국 이건희 회장이 결정하게 되었죠. 이건희는 두 방법 중 위로 쌓아 가는 스택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신의 한수였습니다. 트렌치 방식을 택한 다른 기업들은 집적도가 높아질수록 수율이 떨어져서 경쟁력을 상실했습니다. 일본 기업들이 대부분 그랬습니다. 현대전자도 끝까지 트렌치 방식을 고집하다가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어서야 스택 방식으로 전환했습니다. 시행착오만큼 손실이 발생했겠죠.
1990년대 초반은 반도체 호황기였습니다. 시장도 커지고 가격도 올라서 다들 살만 했죠. 투자도 많이 늘렸습니다. 하지만 또 다시 불황이 찾아왔습니다. 1996년부터 수요가 급격히 줄었고 가격은 급락했습니다. 1997년 현대전자와 LG반도체는 그해 각각 1,835억원, 2,897억원의 순손실을 냈습니다. 삼성도 10년 만에 적자를 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1998년 아시아 외환위기가 터졌습니다. 1998년 새로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IMF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기업들에게 구조조정을 요구했습니다. 결국 LG반도체는 반강제로 현대전자에 합병되었습니다. 현대가 김대중 정부가 원하는 대북투자를 한 대가로 LG반도체를 넘겨받았다고 수근대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덕분에 현대전자가 잠시 살아나는 듯했으나 2001년 또 다시 수렁으로 빠져 듭니다. 닷컴버블이 붕괴되었고 디램 가격은 다시 곤두박질 쳤습니다. 현대전자는 이름까지 하이닉스로 바꿔가며 몸부림을 쳤지만 결국 은행관리로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일본과 미국에서도 디램 기업들은 도산과 폐업, 합병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삼성전자의 압도적 경쟁력을 감당하지 못한 겁니다. 지난 번 영상에서 보셨듯이 1990년 디램 세계 1위였던 NEC와 3위였던 히타치가 메모리 사업부를 떼어 엘피다를 세웠습니다. 2위였던 도시바와 6위 후지쓰도 메모리 사업부를 합쳐 스팬시온이라는 회사를 만들었지만 결국 망했습니다. 그러던 중 2008년 또 한번의 반도체 불황이 닥쳤고 가격 또한 폭락했습니다. 경쟁상대가 죽어야 내가 살 수 있는 상황, 치킨 게임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것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미국의 마이크론5 세 기업입니다. 일본의 엘피다는 마이크론에게 인수되었습니다.
다음 그래프에서 보시듯이 1997년 전세계에 20여개에 달하던 디램 기업들이 불황을 겪을 때마다 줄어듭니다. 2000년에는 20여개, 2008년은 8개, 2014년에는 실질적으로 삼성과 하이닉스, 마이크론의 세 개만 남게 됩니다.
한국 기업들은 낸드 플래시 메모리에서도 세계 최고가 되었습니다. 플래시 메모리는 하드 디스크를 대체한 메모리 반도체입니다.
잘 생각해 보면 디램 치킨 게임의 주범은 한국, 특히 삼성전자입니다. 가격이 떨어지는 데도 투자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상대방은 적자에 기가 질려 문을 닫았죠. 엄청난 가격 인하를 통해 경쟁 상대방들을 무너뜨린 셈입니다.
그러면 삼성전자는 사악한 기업일까요? 삼성 때문에 디램의 생산이 줄고 가격이 올랐다면 그런 비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의 모습은 반대지요. 공급자의 숫자는 줄어드는데 가격은 더욱 떨어지고 생산은 증가했습니다. 삼성과 하이닉스가 위험을 감수하며 투자하고 원가를 떨어뜨렸기 때문입니다. 그러지 못한 상대방 기업들은 모두 망했습니다. 잔인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그 덕분에 인류는 전에 없는 풍요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경제의 원리입니다. 인간의 감정과 정서로는 받아들이기 매우 힘들지만 그 덕분에 인간을 풍요를 누리며 살아갑니다.
스마트폰은 좋은 사례죠. 우리는 그것으로 카톡을 하고 일정을 관리합니다. 음식 주문을 하고 신문을 봅니다. 전화기와 컴퓨터의 결합, 그 스마트폰을 발명한 사람이 스티브 잡스인 건 잘 압니다. 하지만 삼성 반도체 없이는 아이폰도 없었다는 것은 잘 모릅니다. 성능 좋으면서 값도 싼 삼성 반도체 덕분에 아이폰이라는 대박 상품이 만들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제 갤럭시폰이 나온 후 삼성과 애플이 앙숙지간이 되었는데도 애플은 여전히 삼성 반도체로 아이폰을 만듭니다.6 아이폰 속의 삼성 비중이 20%를 넘습니다. 삼성 반도체 만큼 성능 좋고 값싼 제품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죠. 그뿐 아닙니다. 카카오톡, 구글, 페이스북, 네이버처럼 우리가 공짜로 쓰고 있는 많은 SNS들도 메이드 인 코리아의 싸고 좋은 메모리 반도체 덕분에 가능해졌습니다. 한국의 반도체들은 이들을 성공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최강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한국 반도체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2019년 전체 반도체 매출 중에서 메모리는 26%입니다. 비메모리 또는 시스템 반도체가 74%나 되는 거죠. 한국 기업의 메모리 시장점유율은 65%이지만 시스템 반도체에서는 5%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온라인 활동이 느는 덕분에 메모리에 대한 수요도 증가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메모리 강국의 영광이 영원하지는 않을 겁니다. 머지않아 한계에 부닥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조 기술의 한계 때문입니다. 메모리 산업의 경쟁력은 회로의 선폭을 얼마나 가늘게 만들 수 있는지에 달렸습니다. 7나노, 5나노, 3나노 하는 것이 바로 그 말입니다. 문제는 선 폭이 가늘어질수록 누설전기가 많아져서 정밀도를 높이기가 어려워진다는 겁니다. 설계 비용, 제조 비용도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집니다. 그 벽을 넘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선발업체의 신제품 개발이 어렵다는 것은 후발업체의 추격 가능성이 높아짐을 뜻합니다. 삼성, SK하이닉스와 중국 반도체 기업들 사이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중국 반도체 기업이 아직 초보 수준이긴 하지만 삼성과 SK하이닉스가 5나노 또는 3나노 더 나아가 1나노의 벽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중국 기업이 언제 따라올지 알 수 없습니다.7 삼성이 시스템 반도체에 대한 투자를 늘리겠다고 한 이유는 곧 닥치게 될 메모리 기술의 한계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겁니다.
메모리와 시스템 반도체의 결정적 차이는 다양성, 창의성입니다. 메모리 반도체는 하나의 설계도를 가지고 대량생산을 합니다. 시스템 반도체는 다양한 개념과 설계가 필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삼성이 파운드리에 투자를 늘리겠다고 한 것을 시스템 반도체 투자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반도체 하청공장에 투자를 많이 하겠다는 뜻이죠.
어쨌든 한국 기업은 대량생산, 획일적인 것, 이것을 잘 한 겁니다. 일사불란한 군대식 문화 덕분이죠. 1983년 삼성이 64K 디램 개발팀을 꾸리자마자 했던 일이 뭔지 아십니까? 107명 팀원 전원이 무박 2일로 64km 행군을 한 것입니다. 진짜 군대식으로 반도체를 만들어낸 거죠. 그리고 메모리 반도체에선 그것이 대성공을 안겨주었습니다. 하지만 시스템 반도체에선 성과가 좋지 않습니다. 삼성도 한 때 알파칩이라는 CPU 양산에 성공한 적이 있는데 미국 기업 DEC 설계도로 생산한 것입니다.
한국은 군대 문화로 성공한 것들이 많습니다. 조선업, 전자산업, 철강업 등 한국의 주력산업은 모두 그런 식으로 성공했습니다. 심지어 한국인은 예술조차도 군대식으로 성공했습니다. 케이팝이 바로 한국식 예술입니다. 연습생을 뽑아 맹훈련을 시키고 작사, 작곡, 공연 섭외 등 모든 것을 기획사의 명령으로 합니다. 반도체도 그런 방식으로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다양하고 창의적 아이디어가 필요한 시스템 반도체에는 그런 방식이 잘 통하지 않습니다.
일본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디램 시장에서 후발주자에게 따라 잡혔을 때 미국의 인텔과 일본 기업들은 상당히 달랐습니다. 디램의 창시자인 인텔이 일본 기업들에게 따라 잡혔고 1984년 시점점유율이 1%로 추락했습니다. 인텔은 디램을 포기하고 마이크로 프로세서로 전환해서 성공했습니다. 미국의 자유분방한 문화와 다양한 인재들과의 협력을 통해서 이뤄낸 성공입니다. 하지만 일본 기업은 전환에 실패했습니다. NEC, 히타치, 도시바 같은 기라성 같은 기업들이 모두 실패했습니다. 문화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스템 반도체는 다양한 설계를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그 설계들에는 사전에 정해진 답이 없습니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하면서 해결책을 찾아가야 합니다. 다양한 사고와 자유분방한 인재들이 필요합니다. 실리콘 밸리는 그런 것들이 넘쳐나는데 일본에는 없습니다. 사실 군대문화의 원조는 바로 일본이죠. 그래서 인텔처럼 시스템 반도체로 성공하지 못한 겁니다.
중국은 무섭게 달려오고 있습니다. 국가가 엄청난 돈을 쏟아 붓고 있죠. 물론 지금까지 성과는 그리 좋지 않습니다.8 12월 10일 중국 반도체 굴기의 상징인 칭화유니 그룹이 두번째 부도를 냈을 정도입니다. 트럼프 행정부의 경제 제재가 큰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중국은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닙니다. 무엇보다 막강한 인재 풀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US News and World Report가 매년 전공별로 최고의 대학 순위를 발표하지요.9 컴퓨터 사이언스 분야에서 세계 100위 대학들을 보면 한국은 카이스트와 서울대 2개입니다. 일본은 동경대 한 군데이고요. 그런데 중국은 무려 18개나 들어있습니다. 카이스트는 60위인데 칭화대는 4위입니다. 생산 기술 면에서 아직 뒤쳐져 있지만 조만간 추월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도 미국처럼 시스템 반도체로 성공할 수 있을까요. 현재의 군대식 문화로는 어려워 보입니다. 기본부터 바꿔야 할지 모릅니다. 아우는 형님을 따라야 하고 부하는 상사에 복종하는 문화로는 어렵습니다. 명령-복종 식의 군대식 문화를 평등한 개인 대 개인의 계약 문화로 바꾸어 낼 수 있을까요? 한국이 일본의 운명을 벗어날 수 있는지 여부는 여기에 달렸다고 봅니다. 이건희 회장은 마누라,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 해서 어느 정도는 성공을 거뒀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리더도 없는 상황에서 각자의 자각만으로 태도를 바꾸어 낼 수 있을까요?
반도체 시리즈 세번째 편, 오늘은 한국 반도체 산업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다음편은 소재, 부품, 장비를 포함한 글로벌 반도체 산업의 서플라이 체인과 미-중 반도체 전쟁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정호 / 김정호의 경제TV 크리에이터, 서강대학교 경제대학원 겸임교수
1 이병철 회장이 살아있다면 손자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https://news.mt.co.kr/mtview.php?no=2020071014323935496
2 한주엽, 한국반도체 50년 <5>, https://m.etnews.com/20160810000378
3 강기동, 한강의 기적 한국 반도체 시작의 진실, http://www.kdkelectronics.com/korea_semi_pdf/cover-pdf.html
4 민병준, 반도체 성공신화 대한민국 최초 컴퓨터 박사 민병준 회고록, 상상출판, 2014년
5 https://www.chiphistory.org/721-memory-gluts-will-the-dram-oligopoly-end-them
6 아이폰과 삼성칩… "경쟁사인 줄 알았는데…알고 보면 삼성전자가 최대 고객사입니다. 2020. 07. 02 https://1boon.kakao.com/ziptoss/5ef0603117371c537f41b8a0
7 With miniaturization at a wall, upstarts gain edge in race for faster chips, Nikkei Asia 2020.10.21, https://asia.nikkei.com/Business/China-tech/Semiconductor-tech-trends-favor-China
9 https://www.usnews.com/education/best-global-universities/computer-sc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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