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영상 보기▶ https://youtu.be/-MR0InP2sZU
오늘은 일본 반도체 이야기입니다. 일본 반도체는 세계 최강이었습니다. 1990년 세계 반도체 기업 랭킹 1, 2, 3위는 모두 일본 기업이었습니다. NEC, 도시바, 히타치 순이었습니다. 10위 안에 일본 기업이 6개나 됐습니다. 반도체를 창조한 나라, 미국 기업은 인텔, 모토로라, TI 3개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 일본은 줄곧 내리막길이었습니다. 2020년 10대 반도체 기업 1위는 미국의 인텔, 2위는 한국의 삼성전자, 3위는 대만의 TSMC입니다. 10위 안에 일본 기업은 없습니다.
일본 반도체의 주력은 메모리 반도체인 디램(DRAM)이었는데, 1980년대 중반 선두주자인 인텔을 누르고 세계 1위에 올랐지만 1990년대 이후 대한민국의 삼성과 SK하이닉스에 밀렸습니다. 일본의 반도체 기업들은 미국은 이겼지만 한국에게는 졌습니다. 그 결과 일본에 영광을 안겼던 디램 산업 자체가 괴멸되어 버렸습니다. 오늘의 주제는 바로 그 일본 반도체 이야기입니다.
국뽕에 취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들이 걸었던 실패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한국은 일본과 닮은 점이 많습니다. 지금 한국 반도체가 정상에 올라 있지만 얼마나 더 갈지 알 수 없습니다. 자칫 방심하면 그들이 빠져들었던 함정에 똑같이 빠져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성공했고 어떻게 패배했는지를 복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일본은 반도체로 크게 세번의 붐을 이뤄냈습니다. 첫번째는 1950년대 소니의 트랜지스터 라디오 붐, 두번째는 1960~1970년대의 계산기 붐, 세번째이자 마지막은 1980년대의 디램 반도체 붐입니다.
먼저 트랜지스터 라디오 붐부터 알아보죠. 트랜지스터가 발명된 것은 1947년 벨연구소의 세명의 과학자였습니다만 그것으로 라디오를 만들어 팔아 돈을 벌기 시작한 것은 1954년 TI(텍사스 인스트루먼트)였습니다. 그 이전의 라디오는 진공관 방식이었는데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나오면서 휴대용이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다음 해인 1955년 일본에서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출시됩니다. 이부카 마사루와 모리타 아키오가 이끄는 동경통신공업 제품이었는데요. 직원 7명의 작은 신생기업이었죠. 원천 기술은 AT&T의 특허를 사왔지만 생산 기술은 자체 개발했습니다. 소니 라디오는 당시 일본을 풍미하던 맘보 음악 열풍을 타고 큰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여세를 몰아 미국으로도 진출해서 싼 가격으로 미국 소비자들을 매료시켰습니다. 패전국 일본의 첨단 제품이 승전국인 미국에서 성공을 거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소니의 성공을 보면서 도시바, 히타치, 샤프 같은 기존 대기업들도 트랜지스터 라디오 제조에 뛰어 들었습니다.1 1959년이 되자 일본에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공급하는 기업은 11개에 이르렀고2 미국 트랜지스터 라디오 시장의 50%를 점했습니다. 일본은 세계 최대의 트랜지스터 라디오 생산국이 된 것입니다.3 그 라디오의 부품인 트랜지스터는 자체 생산한 것이니 세계 최대의 트랜지스터 생산국도 된 것이죠.
두번째의 붐은 휴대용 계산기로 만들어집니다. 컴퓨터 말고 휴대용 계산기 말입니다. 미국에서는 1950년대도 이미 진공관식 계산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크기가 너무 큰 데다가 값도 거의 자동차에 맞먹을 정도였습니다.4 1964년 동경 올림픽을 앞둔 시점에 일본의 샤프 전자가 훨씬 작은 크기의 트랜지스터 계산기를 출시했습니다. 값은 500만원대였습니다. 일반 소비자들이 구매할 수 있는 가격의 계산기는 1970년이 되어서야 나옵니다. 미국의 TI와 일본의 캐논이 합작생산으로 포케트론이란 제품을 내놓습니다. 휴대용이면서 가격은 50만원 수준이었습니다. 수백만원대의 기존 제품에 비해서 정말 착한 가격이 된 거죠. 그 후로 카시오, 도시바 등 일본 기업들은 세계 계산기 시장의 최강자로 떠오릅니다.5 일본 기업의 1965년 생산량이 4,300개였는데 15년 후인 1980년 연간 6,000만개를 생산하게 되죠.6 값은 1만원 수준으로 낮아졌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계산기의 부품인 고집적회로 VLSI, 마이크로 프로세서 같은 것들도 발전하게 됩니다.
세번째 붐은 디램 제조의 성공으로 가능했습니다. 디램은 1971년 인텔이 최초로 발명하고 시판에 성공했습니다. 당연히 인텔이 최강자였죠. 일본도 곧 디램 개발에 착수합니다. 그러던 중 1973년에 오일쇼크로 인해 반도체 매출도 급감했습니다. 인텔을 비롯한 미국 기업들은 생산 시설에 대한 투자를 줄였습니다. 반면 일본 기업들은 오히려 투자에 박차를 가하죠. 클린룸을 확대하고 생산 설비 등을 더욱 대규모화, 정교화합니다. 그러면서 일본 기업들의 수율이 급격히 상승했고 생산 원가의 하락을 이뤄냅니다. 1986년 1M 디램의 생산 원가를 보면 미국이 11.83달러인데 일본 도시바는 1/3도 안되는 3.31달러에 불과했습니다.7 미국 기업들이 도저히 일본 기업과 가격 경쟁을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디램의 원조인 인텔의 경우 1974년 82.9%였던 시장점유율이 1984년 1.3%로 추락했습니다.8 결국 디램 사업에서 철수하고 말았죠.
1987년 일본의 디램 세계 시장 점유율은 80%에 이르게 됩니다.9 압도적인 1위에 오른 것이죠. 1975년까지만 해도 세계 반도체 기업 랭킹 1, 2, 3위는 미국의 TI, 모토로라, 그리고 네덜란드의 필립스였습니다. 10위 안에 든 일본 기업은 없었습니다. 1980년만 해도 시장점유율 25%였는데 1987년 80%가 되었습니다. 경이적인 성공을 이뤄낸 것이죠. 일본 반도체의 강세는 1990년대 초반까지 이어집니다.
일본이 반도체 종주국인 미국을 뛰어 넘어 정상에 오를 수 있었던 원인이 무엇이었을까요. 수많은 이유들이 있겠지만 중요한 것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다음 네 가지입니다.
첫째, 일본은 미국과 달리 반도체의 상업화에 전념했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반도체의 가장 큰 용도가 군사용, 우주개발용이었습니다. 레이더, 우주선 개발 같은 것이었죠. 기업들의 고객은 자연스럽게 미국 정부였습니다. 1952년 AT&T 자회사인 웨스턴일렉트릭의 매출액 전액이 군사 관련이었습니다. 1955~1959 미국 반도체 매출의 38~45%가 미국 정부 구매였다고 합니다.10 그러다 보니 가격 경쟁이 치열하지 않았습니다. 군대 보유가 금지된 패전국 일본은 가진 능력을 모두 일반 소비자용 제품에 쏟아 부었습니다. 제품들은 품질과 가격 경쟁에 노출되었고 치열한 노력이 촉진되었습니다. 게다가 일본인들의 소득이 급격히 늘면서 매출이 늘었고 규모의 경제 효과가 발생했습니다. 반도체 수율이 급격히 높아져 원가가 떨어지고 가격 경쟁력이 생겨났습니다.
둘째는 한 우물을 파는 일본인 특유의 장인 정신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수백년 역사의 우동 가게, 종이 가게, 도자기 가문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런 집요함과 정교함이 반도체의 품질과 수율을 높였습니다. 사실 반도체뿐 아니라 다른 많은 전자 제품들, 자동차, 조선, 철강 등 거의 모든 제조업에서 성공을 거뒀습니다. 미국, 영국 등 선진국에서 발명된 창의적 제품들을 가져다가 자신들의 정교함을 더해서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셋째는 여러 계열사가 얽혀 있는 구조도 성공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오일 쇼크 등 불황이 닥치고 매출이 줄어들자 미국 기업들은 투자를 포기했는데 일본은 오히려 투자를 늘립니다. 다시 호황이 찾아왔을 때 승기를 잡게 된 것입니다. 불황시에 투자가 가능했던 것은 다른 계열사로부터의 교차보조 덕분이었습니다. 독립 회사 시스템인 미국은 그런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넷째는 정부 지원과 보호입니다. 처음부터 일본 정부가 반도체 등 전자산업을 지원하지는 않았습니다. 철강, 자동차, 석유화학 등 중화학공업만 지원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950년대 말 소니의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미국 시장에서까지 성공을 거두자 전자산업도 지원 대상에 포함시키게 됩니다. 외국 제품의 수입을 제한하고 연구개발 및 투자를 지원하는 형태였죠. 이것이 어느 정도 일본 반도체의 성공에 기여했던 것이 사실인 듯합니다. 1980년대 중반부터 미국의 견제로 정부 지원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들로 일본 반도체 산업은 1986년부터 세계 정상에 서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영광은 1993년부터 꺾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그래프에서 보시듯이 그 무렵부터 시장점유율이 급격히 추락합니다. 한국의 삼성 반도체가 본격적 강자로 등장하게 됩니다. 1998년 아시아 외환위기는 일본 반도체 산업에 치명타를 가했습니다. 세계 반도체 수요가 급감했고 일본 반도체 업체들의 적자는 심화되었습니다.
2000년 전후 일본 반도체 업체의 상당수는 디램에서 철수해서 비메모리인 SoC(시스템온칩)으로 방향을 돌리게 되었습니다.11 도시바는 2002년 디램 사업을 포기합니다. NEC, Hitachi, 미쓰비시는 메모리 사업을 합쳐서 엘피다를 세웠습니다. 엘피다는 잠시 회생하는 듯했으나 2008년 세계금융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다시 적자 늪으로 빠져 들었습니다. 2012년 엘피다는 법정관리에 들어갔다가 2013년 미국의 마이크론이 인수해서 마이크론 재팬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비메모리의 경우 히타치와 미쓰비시가 SoC 등 비메모리 사업을 합쳐서 2003년 르네사스 테크놀로지를 설립했습니다. 2010년에는 NEC의 비메모리까지 합병했습니다. 일본 대지진의 여파로 극심한 불황을 겪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사모펀드인 KKR의 적대적 인수 위협에도 놓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1.5만명의 직원을 해고했고 모바일 사업부를 미국의 브로드컴에 매각했습니다. 2019년 현재 비메모리를 포함한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일본의 점유율은 10%로 3위입니다. 1위는 47%의 미국, 2위는 19%의 대한민국입니다. 이제 세계 10대 반도체 기업 순위에 속하는 일본 기업은 없습니다.
그토록 대단하던 일본 반도체 산업이 왜 이렇게 처참하게 괴멸되었을까요? 첫번째 원인은 시장은 변했는데 일본 기업들은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성공 원동력은 기술과 품질을 집요하게 추구하는 태도였습니다. 그들의 정밀함이 디램 반도체의 집적도를 64K, 256K, 1MD 램으로 높여 주었고, 미국 기업들보다 수율을 높여서 가격 경쟁력을 만들어 냈습니다. 좋은 품질, 낮은 가격 덕분에 IBM, 하니웰 등 미국의 대형컴퓨터 기업들은 인텔, 모토로라 같은 미국산 반도체 대신 일본산 반도체를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시장은 급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스티브 잡스 같은 천재들이 퍼스널 컴퓨터를 만들어 냈습니다. 급기야 대형컴퓨터의 본산이던 IBM까지 퍼스널 컴퓨터 제조에 뛰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IBM 호환기종이라는 것이 생겨나면서 1,500달러 정도의 돈으로 컴퓨터를 장만할 수 있게 되었죠. 1986년 미국 유학 시절 저도 대만제 AT 컴패티블이라는 컴퓨터를 구입했습니다.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대형 컴퓨터의 시대가 가고 싸구려 PC의 시대가 열린 겁니다.
값이 저렴할수록 잘 팔리니까 부품들도 다 값이 저렴해야 했습니다. 그 덕분에 1983년 투자를 시작해서 계속 적자만 봐왔던 삼성전자의 저가 디램이 불티나게 팔려나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본 반도체 기업들은 바뀐 세상을 외면한 채 계속 대형컴퓨터용 반도체, 즉 수명 25년 이상의 고품질 반도체를 만들었습니다.12 싼 값으로 인텔에게 승리했지만 더 싸게 치고 나오는 삼성반도체를 감당하지 못하게 된 겁니다.
삼성 제품이 본격적으로 시장에 나오면서 1985년 3.5달러이던 256K 디램 가격은 1986년말 2.2달러까지 추락합니다.13 가격 경쟁력을 잃은 일본 기업들은 256K를 포기하고 다음 세대인 1M 디램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새로운 시장은 생겨나지 않았고 오히려 저사양 제품인 256K 디램의 수요가 늘고 가격도 뛰기 시작했죠. 저가 PC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987년 2달러 수준에서 1988년 3.5달러로 올랐다가 1989년 말까지 3달러 선을 유지했습니다. 일본 기업들은 정면 대결 대신 상위 제품으로 도망한 형국이 되었죠. 그러는 과정에서 한국 기업들의 실력이 늘었고 결국 상위 시장도 한국에게 내주게 되었습니다. 16M부터는 오히려 한국의 삼성이 일본 기업보다 앞서 나가게 되었습니다.
1985년 플라자 합의에 따른 엔화 강세, 1986년 미일 반도체 협정을 통한 반덤핑 규제 강화 같은 것도 물론 일본 반도체 산업의 추락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일본인들, 일본 기업의 자세에 있다고 봐야 할 겁니다. 특히 일본 특유의 기술지상주의와 일본 기업의 체질 변화입니다.
기술지상주의, 즉 한 우물만 파는 집요한 장인 정신, 사람들은 그것을 좋게만 보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수요가 변하지 않을 때에나 통하는 전략입니다. 예를 들어 일본에는 수백 년 된 료칸, 우동집, 덴뿌라집 이런 곳들이 많은데요. 이들이 성공하는 이유는 일본 소비자들이 비싼 가격을 치르고도 그런 데에 돈을 쓰기 때문이죠. 하지만 수요 자체가 바뀐다면 한 우물을 파는 것은 시간과 노력의 낭비입니다. 물 마실 사람도 없는데 우물을 파는 격이죠.
시장은 늘 변합니다. 특히 글로벌 시장은 더욱 급격히 변합니다. 변화에 적응하는 기업은 살고 아니면 소멸합니다. 소비자들은 저가의 피시를 원하는데 일본인들, 일본 기업들은 고가의 정교한 디램에 집착하다가 세계 소비자로부터 버림을 받고 말았습니다.
두번째 원인은 기업 지배구조의 변화입니다. 위대한 창업자 세대가 살아 있었다면 사정이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일본인들은 각자 움직일 때보다 누군가의 통솔을 받을 때 더 강한 힘을 발휘하는 듯합니다. 지도자가 중요한 거죠. 전쟁 직후에는 경영의 신이라고 불리는 위대한 경영자들이 등장했습니다. 파나소닉을 세운 마쓰시타 고노스케, 소니를 세운 아키오 모리타, 혼다 소이지로, 쿄세라의 이나모리 가쓰오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일본인들을 이끌고 세계 최고의 제품들을 만들게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사라진 후 일본의 기업들은 직원이 경영하는 조직으로 변했고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상태로 변해갔습니다.14 시장은 과거와 완전히 달라졌는데 기업 구성원들은 예전에 하던대로 기술에만 집착했던 겁니다.
파나소닉의 설립자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대표적인 창업자 세대죠. 그는 직원들에게 늘 수돗물 철학을 강조했습니다.15 "사람들이 수돗물을 쓰듯이 전자제품을 손쉽고 값싸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원칙이었습니다. 그러려면 좋은 제품을 끊임없이 싼 값에 만들어내야 합니다.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이 가능하도록 직원들을 설득해냈던 사람이 마쓰시타 고노스케였습니다. 1989년 그가 세상을 떠난 후 파나소닉은 더 이상 예전처럼 좋은 제품을 수돗물처럼 싼 값에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일본항공 JAL의 부도와 회생은 창업세대의 태도와 능력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1952년 설립된 일본 항공, 한 때는 잘 나갔지만 적자를 못이기고 2010년 법정관리에 들어갑니다. 구원투수로 등장한 사람이 78세의 이나모리 가쓰오입니다. 전자부품 회사인 교세라를 세워 세계적 기업으로 키웠고 나이가 많아 명예회장으로 물러났지요. 그는 항공에 항자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 이나모리 회장이 부도난 일본항공을 맡아 1년 3개월만에 흑자로 돌려 놓았습니다.
그가 한 일은 직원들이 기본에 충실하도록 설득한 것이었습니다.16 일본항공 직원들은 일류대 출신 엘리트들이 많답니다. 하지만 이들은 문제가 있어도 나서서 해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관리인으로 취임한 이나모리 회장은 적자노선을 폐지하고 비용을 줄여나갔습니다. 그러면서도 서비스의 질은 높였습니다. 숨은 비용들, 직원들의 태만한 자세 같은 것을 고쳤기 때문입니다. 우리식 표현으로 하자면 그의 경영 방침은 그야말로 꼰대 스타일입니다. 거짓말하지 말라, 남에게 친절히 대하고 폐 끼치지 말라. 회의 때마다 간부들에게 이런 잔소리를 해댔습니다. 일본항공에는 그런 기본이 사라졌던 겁니다. 놀랍게도 일본항공은 1년 3개월만에 흑자를 냈고 재상장을 해서 정상화되었습니다.
이나모리 회장은 전후 창업세대를 대표하는 경영의 신 중 마지막 인물입니다. 그런 지도자가 사라진 일본 기업은 결단을 하지 못하는 조직, 서로 책임을 회피하는 조직이 되어 버렸습니다. 고통스럽고 위험한 일일수록 더욱 결단을 내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회사가 망해가는데도 직원들은 그 때까지 해왔던대로 정교한 고가의 제품을 만드는 일에 매달리다가 괴멸적 상황을 맞이한 것입니다.
삼성은 36년동안 디램 시장에서 최고의 공급자라는 지위를 잘 유지해왔습니다. 2000년대부터는 SK하이닉스도 반도체 최강자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일본 반도체의 괴멸을 먼 산 보듯 해서는 안됩니다. 시장도 기술도 급변합니다. 소비자의 마음이 어떻게 변할지, 일본 기업에게 삼성전자라는 저승사자가 나타났듯이 한국 기업에게도 언제 어디서 어떤 경쟁자가 나타날지 안심할 수 없습니다. 그나마 한국 기업들은 창업자가 세상을 뜨더라도 2세에게도 경영권이 상속되어 회사가 무기력하게 표류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오너십을 파괴하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 기업도 언제 리더십이 사라지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직원들의 회의체로 바뀔지 알 수 없습니다. 다음 편은 한국 반도체 산업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김정호 / 김정호의 경제TV 크리에이터, 서강대학교 경제대학원 겸임교수
* 이 글은 2021.1.4 <김정호의 경제TV>로 방영된 <일본 반도체, 왜 미국엔 이기고 한국엔 졌나?>의 텍스트입니다.
1 https://en.m.wikipedia.org/wiki/Transistor_radio
2 L. H. Lynn,, The commercialization of the transistor radio in Japan, September 1998 IEEE Transactions on Engineering Management 45(3): 220-229.
3 T. Hoeren, F. Guadagno, S. Wunsch-Vincent, Breakthrough technologies- Semiconductor, innovation and intellectual property, World Intellectual Property Organization, 2015
4 Kathy B. Hamrick, The History of the Hand-Held Electronic Calculator, The American Mathematical Monthly Vol. 103, No. 8 (Oct., 1996), pp. 633-639.
5 Episode 6. Semiconductor Golden Age Brought by Calculators, Makimoto Library.
6 The Calculator Wars: A video history of Japan's electronic industry (Part 3)
7 The Decline of the U.S. DRAM Industry: Manufacturing, US OTA publication.
8 https://anthonysmoak.com/2016/03/27/andy-grove-and-intels-move-from-memory-to-microprocessors/
9 Trends in the Semiconductor Industry, https://www.shmj.or.jp/english/trends/trd80s.html
10 T. Hoeren, F. Guadagno, S. Wunsch-Vincent, Breakthrough technologies- Semiconductor, innovation and intellectual property, World Intellectual Property Organization, 2015
11 유노가미 다카시(임재덕 역), 일본 전자·반도체 대붕괴의 교훈, 성안당, 2019년, p. 102.
12 유노가미 다카시(임재덕 역), 일본 전자·반도체 대붕괴의 교훈, 성안당, 2019년, pp. 60-63
13 김재훈 (2014) 한국과 일본의 반도체 전쟁: 파괴적 혁신을 통한 역전, 한림일본학, 24, 167-197
14 기타오카 도시아키, 일본디베이트연구협회(장서명 역), 세계 최강기업 삼성이 두렵다-일본인이 직접 쓴 삼성 해부서, 책보출판사, 2006, pp. 143-144.
15 https://www.hellodd.com/news/articleView.html?idxno=35713
16 오니시 야스유키(송소영 역), 이나모리 가즈오 1,155일간의 투쟁-재생불능 진단을 받고 추락하던 JAL은 어떻게 V자 회복을 했나, 한빛비즈, 2013.
NO. | 제 목 | 글쓴이 | 등록일자 | |
---|---|---|---|---|
68 | 중국 공산당, 기업 장악을 위해 미국 돈도 버리다! 디디추싱 사태를 보는 시각 김정호 / 2021-07-20 |
|||
67 | 수소경제, 신의 한 수 또는 악수? 김정호 / 2021-07-13 |
|||
66 | 신안 해상풍력발전 투자 48조 원, 어떻게 볼 것인가? 김정호 / 2021-07-06 |
|||
65 | 중국 고립은 심화되는데, 위안화는 왜 강세인가? 김정호 / 2021-06-29 |
|||
64 | 글로벌 최저한세, 증세 경쟁의 시작인가? 김정호 / 2021-06-22 |
|||
63 | 엘살바도르는 왜 비트코인에 승부를 걸었나? 김정호 / 2021-06-15 |
|||
62 | 미-중 사이에 끼인 한국 배터리 산업, 괜찮을까? 김정호 / 2021-06-08 |
|||
61 | 탈원전으로 위험 고조되는 한국 전기 사정 김정호 / 2021-05-25 |
|||
60 | 이미 시작된 인플레이션, 내 투자는 어쩌나? 김정호 / 2021-05-18 |
|||
59 | 에너지 혁명: 과거, 현재, 미래 김정호 / 2021-05-11 |
|||
58 | 이건희 상속세 한국은 12조, 영국은 4조, 스웨덴은 0원 김정호 / 2021-05-04 |
|||
57 | 전문경영의 민낯: 미국형은 비정, 일본형은 무능, 한국형은 부패 김정호 / 2021-04-27 |
|||
56 | ESG 거품론, 왜 나오나? 김정호 / 2021-04-20 |
|||
55 | 오세훈의 재건축 정상화가 넘어야 할 산 김정호 / 2021-04-13 |
|||
54 | LH 대책에 대해서 김정호 / 2021-04-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