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변(speculation), `사변적 인간(speculative men)`

자유주의 입문 독서토론모 / 2023-04-03 / 조회: 2,530

사변-적, 思辨的

(관형사)

경험의 도움을 받지 않는, 순수한 이성에 의한 순(純) 이론적인 (것).


정치사회에 관한 서구의 글들을 보다보면 speculation, speculative란 단어가 일상적으로 나옵니다. 사회과학적 전통이 짧은 우리 사회의 언어구성으론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바로 연상시킬 정확한 번역단어가 마땅치 않습니다. 과거의 번역서를 보면 '사변'이라고 되어있지만, 한글세대에겐 무슨 뜻인지 연상이 더욱 어렵습니다.


반대말을 찾으면 의미 가늠에 도움이 됩니다. 사변(speculation) (혹은 관념)이란 말은 대개 실천(practice)이라는 말과 대조되어 사용됩니다. 또한, '추상적,사변적'의 반댓말은 '구체적,경험적'입니다.


자유의 이론에서 반대되는 두가지 전통이 있습니다. 하나는 경험적(empirical)이고 비체계적 (unsystematic)인 전통이고 다른 하나는 사변적(speculative)이고 합리주의적(rationalistic)인 전통입니다. 즉, 전자는 자생적으로 성장한 전통과 제도의 해석에 기반을 둔 스코틀랜드 자유주의의 전통이며, 후자는 유토피아의 건설을 목표로 하며 인간 이성의 힘을 믿는 프랑스 합리주의의 전통입니다.


즉, 사변은 경험보다는 이성의 힘으로 무언가를 유추해내는 순수이론적 행태를 말합니다. 이 글은 사회주의로 이어지는 후자의 사변적 철학행태를 비난하는 작업을 반복하는데 그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변의 힘. 오직 그것만 맹신하다보면 잘못된 결론으로 이끄는 힘. 하지만 한계를 인식하며 반드시 활용해야 할 그 힘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존 스튜어트 밀은 이렇게 말한 바가 있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인류에게 주어졌지만 무시됐던 교훈은 이것이다. 겉보기에는 삶의 실제 문제, 당장의 문제와는 동떨어진 듯 보이는 것이 사변적 철학(speculative philosophy)이다. 하지만 사실 이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반드시 지켜야 할 것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다."

잘못된 결론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의 사변철학이 위력을 떨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적어도 그의 이 말에는 어느정도의 진실이 담겨있어 보입니다.


미국의 건국과정에서 연방제의 형태를 어떻게 취할 것인가를 설득하는 <<연방주의자 논집>>에서 연방정부의 힘이 국민 개개인에게까지 미쳐야 하는 이유를 제시하며 저자들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지방정부의 혜택은 현실적이고 직접적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쉽게 인식한다. 하지만 중앙정부에서 유래하는 혜택은 대다수 시민들에게 덜 직접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중앙정부의 활동은 주로 사변적인 사람들(speculative men)에 의해 인식되고 주목받는다."

사변적으로 사고하는 사람들, 즉 이상주의자들이 하는 사회적 역할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들이 사변적 인간을 추종한 것은 아닙니다. 평화시 군 상비체제를 배제하도록 주장하거나 지도자의 유임을 과도하게 금지시키려는 지나친 이상주의가 미친 악영향을 막으려 한 입헌장치도 언급합니다.


하이에크는 <<자유헌정론>>과 <지식인과 사회주의>에서 추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상가(abstract thinker), 즉 사변적 인간의 강력한 힘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이들의 사변에 의해 탄생한 아이디어가 대중지식인들을 거쳐 한 세대 공동의 자산이 되고난 이후엔 정치행위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변적 사상가의 그 결과물이 영향력을 행사하기 전에 선택과 수정이라는 기나긴 과정을 거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러기 위해 우리들 고전적 자유주의자들도 몽상가가 될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대중지식인들이 매혹될만 한 보편적 이념과 유토피아를 그려내야 한다고 사변의 힘을 이야기 합니다.


미제스도 사변의 힘으로 공리주의적 검토를 통해 사회주의의 오류를 증명해내고 그 실패를 예견했습니다. 사변의 힘이 없이는 미래를 그려내지도 재앙을 예측하지도 못합니다.


사변에 의한 관념의 제국, 아리스토텔레스제국에 반기가 들린 것은 17세기 프랜시스 베이컨에 이르러서야 입니다. 대륙의 변방인 우리나라가 주자학이라는 사변적 관념의 철옹성에 최근까지 갇혀있던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아담 스미스조차도 도덕감정론을 집필할 당시 신의 가호로 유지되는 조화로운 질서를 믿는 단순한 사변적 철학자였다가 국부론을 집필하던 즈음에야 상식과 사실을 폭넓게 고려하는 현실적 탐구자로 변신했습니다. 이는 사변적 철학의 방식은 그만큼 이 시대의 인류에게 아직도 익숙하고 강력한 설득력을 가진 방식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사변적 방식을 일시에 버리지 않고서도 사변적 세계관에서 스스로 진일보해 나올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변적 철학관념이 주자학의 형태로 가장 마지막까지 독점적 위력을 떨친 우리나라의 경우, 사변적 사고방식 즉 이상주의적 태도가 아직까지 사회와 정치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에게 중요한 전략적 힌트를 제시합니다. 우리 사회를 장악한 이상주의적 구성주의와 싸우면서 사변적 방식 전체를 부정하는 보수적 접근만으로는 승산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유주의의 확산을 위한 싸움에서, 우리가 발딛고 있는 이 사회는 보편적 이념과 유토피아의 제시라는 방법이 더욱 큰 위력을 발휘할 토양이라는 것입니다.


2023.4.3. 남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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