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의 갈등과 위기의 본질

홍형 / 2007-01-31 / 조회: 20,725

다음 글은 현재 일본에 체류하며 한반도 문제를 연구하는 전문가 (홍형 현 와세다 대학 한국한 연구소 연구원, 전 주일 대한민국 공사)께서 일본의 한반도 및 북한 문제에 대한 인식과 대응 방식을 현지에서 보고 느낀 사실에 근거해서 정리한 것이다. 한반도 문제에 대한 일본의 인식과 일본의 향후 대북 정책의 진행 방향을 현실적 시각에서 분석하고 있다. 일본 현지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을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그대로 두었음을 밝힌다. [편집자 주]


1.서 론


김대중, 노무현 정권 9년간 한국의 안보태세는 크게 약화, 결정적으로 손상되고 있다. 한국사회의 보통 지식인, 상식인 들은 안보문제에 관해, 주로 노무현 정권이 한미연합사령부 해체 등 한미동맹을 회복이 어려울 정도로 약화시킨 것을 우려, 고심하지만, 더욱 중요한 사실중의하나는 한국 안보의 축이라고도 할 수 이는 한일 관계도 결정적으로 손상되었다는 점이다.


한일간 마찰, 갈등이라고 하면, 한국사회는 흔히 무역 적자나, '역사인식’ 내지, 反日, 反韓 등 '감정문제’와 관련된 것을 주요현안으로 여기는 분위기지만, 국가관계(한일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안보차원의 관계일 것이다.


지금 한일 양국관계는, 일반인들이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그 동안 양국이 '관리 가능했던’ 제반 마찰과 갈등이 '전략적 충돌’의 국면으로 바뀌고 있다는 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 알기 쉬운 현상으로서, 북핵(北核)문제에 대해 이미 외교사령으로도 '한미일(韓美日)간 긴밀한 공조’라는 표현은 학자들이나 언론보도에서도 발견하기 어렵게 되었다.


쉽게 말하자면 동서냉전체제 종식 후, 한국은 이념적 "반공(反共)국가"에서 "보통국가"로, 그리고 좌파적 정권하에서 좌경화가 가속되어 왔는데 반하여, 일본은 냉전 시 "정경 분리"(政經 分離)와 "전방위 외교"(全方位 外交)를 표방하던 소위 "안보 무임승차 국가"로부터 사회전반이 급속히 보수화, 우경화되고 있는 것이다. 좌경화 노선과 우경화(보수화) 노선이 갈등, 충돌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원래 한일 양국이 국교정상화(1965) 이래 '동맹적 관계’를 유지해온 것은, 양국이 자유민주주의라는 가치를 공유하는 기반 위에, 한미동맹과 미일동맹이라는 강력한 접착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냉전" 그 자체가 멀어질 수도 있었던 한일 양국관계를 묶어왔던 "접착제"였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접착제가 없어지면 결합, 결속이 떨어지게 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한국은 동맹관계를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효율적인 '접착제’를 찾는 것 같은 다양한 노력이 끊임없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안보태세 정비를 소홀히 한 채 관성적으로 지내왔다. 안보환경이 급격히 변함에 따라, 한일 양국의 대응의 차이는 점점 확대되어 왔다. 동서냉전체제 종식 이래 한반도 주변에서 발생한 몇 개의 사건과 그에 대한 대응을 간단히 보면 한일 양국의 전략적 대립에 이르게 된 경과를 볼 수 있다.


2. 냉전 종식과 일본의 전략적 선택: 대미 동맹의 유지 및 강화


동서냉전체제가 종식되었을 때 일본사회에도 혼란과 고민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맹을 냉전 이후에도 계속 유지해야 할 것인가의 여부로 심각한 논란이 있었던 것이다. 일본은 역사의 교훈을 깊이 인식한 일본은 냉전 이후에도 미일 동맹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일본은 19세기말 이래 국운을 걸었던 몇 차례의 전쟁에서 동맹을 잘 맺었을 때에는 승리했고(英日同盟을 배경으로 淸日戰爭, 러일전쟁에서 승리), 동맹을 잘못 선택했던 태평양전쟁에서는 패전, 역사상 처음으로 나라가 점령당한 경험을 깊이 인식했기 때문이다.


반면, 세계사상 최단기간에 '압축성장’과 '민주화’를 달성하고,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 냄으로서 동서 냉전체제를 종식시키는데 역사적으로 기여했던 한국은 놀랍게도 안보환경 변화에 대해 고민과 검토가 없었다. 한국사회가 자신감 과잉으로 말미암아 主敵인 평양의 독재체제의 위협에도 둔감해지고,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관대해지고 있을 때, 일본의 입장이 어떠했었는지, 일본은 어떻게 냉전 후 국제정세 변화에 적응, 대응해 왔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일본은 동서냉전 종식 후 주변국과의 관계설정에 혼란을 겪는다. 일본 당국은 우선적으로 한국과 안보대화를 원했지만, "북방외교"에 몰두해있던 노태우 정권은 일본 측의 희망과 접근에 응하지 못했다. 한일관계의 異常(이상)은 여기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양국이 전략적으로 간격이 벌어지는 것은 어찌 보면 예정된 일이었던 것이다.

1990년대 들어오면서 평양 측의 핵무기 개발 의혹이 표면화 되었으나, 정작 당사국인 한국은 실효성을 장담할 수 없는 한반도비핵화선언(1991.12) 등으로 대응할 뿐이었고 이에 일본이 불안감과 무력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 이었다. 일본 내에도 소위 '진보세력’들은 안보문제에서는 미국에 의존하면서 북한 문제는 관념론적 대응에 치중함으로서 일본 사회내의 불만과 스트레스가 고조되었다.

일본사회는 냉전 종식 후의 본격적 전쟁이었던 걸프전쟁(1991.1)시 자신들이 다국적군을 위해 130억 달러라는 거액의 전비(戰費)를 지원하고도, 쿠웨이트로부터 전혀 감사를 받지 못했다는 데 충격을 받게 되며, 이는 일본사회의 우경화를 촉구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이후 일본은 국제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다. 유엔 캄보디아 잠정통치기구(UNTAC)를 주도하는 등 평화유지활동에서 단계적으로 활동을 넓히다가, 9.11테러 후에는 인도양에 해상자위대 함정을 3척 파병(2001.11) 하고, 비 전투부대이기는하지만 중동에까지 지상군 병력을 파병하고 있는 것이다.


3. 일본의 보통국가화에 기여한 북한


무력감에 빠져있던 일본사회에 국가의식, 안보의식을 각성시키고, "보통국가"의 명분을 제공한 것은 주로 김정일이었다. 일본은 대포동 미사일이 일본 열도를 넘어 발사(1998.8)되자, 즉각 대북 식량지원 등을 중단했으며, 불과 3개월 후엔 정찰위성 보유를 결정하게 된다. 그 이전엔 일본이 정찰위성을 보유한다는 것은 공론화 거론조차 어려운 문제였다. 일본은 이 같은 숙원사업을 김정일의 도발을 이용하여 성취했던 것이다. 북한 공작선의 일본영해 침범 후 도주사건(1999.3)등은 일본의 "유사법제"를 신속히 정비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물론, 일본은 대북 강경책만을 쓴 것은 아니다. 주변정세 변화에 맞추어 기회 있을 때마다 日北관계 정상화를 시도했다. 코이즈미 총리는 한국과 공동주최했던 월드컵이 끝나자마자 미국의 비위를 거스르면서까지 평양으로 달려갔을(2002.9) 정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日北 교섭, KEDO 지원 등 김정일 정권과의 접촉에서 "벼랑 끝 외교" 등에 피로감과 혐오감만을 느끼게 되는 일본 측은 점차 당근보다 강경책에 기울게 된다. 한국사회에서는 일본이 우경화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소리도 있으나 일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반응인 것이다.

일본정부는 냉전시대이래 다섯 차례 "대북제재"를 단행 했다. 미얀마 아웅산 묘 폭탄테러(1983.9), 대한항공 KE-858기 폭파테러(1987.11), 대포동 미사일 발사(1998.8), 미사일 대량발사(2006.7), 핵폭발 실험(2006.10) 직후 일본은 북한에 대해 제재를 단행 했던 것이다. 동서냉전 시대의 일인 앞의 두 경우는 "국제적 제재조치에 참여"했던 것이었고, 이후엔 일본의 "독자적 제재조치"였다. 특히 작년) 김정일의 미사일(2006.7.5)과 핵실험 도발(10.9)에 대해서는 독자적인 제재조치는 물론, 미국 등과 긴밀한 협조 하에 유엔의 제재조치를 주도했다.


위에서 보듯이 일본이 이러한 노선 변화를 보이는 동안, 한국은 뚜렷한 전략 없이 한일관계를 방치해왔다. 국내의 "전통적(?) 反日감정"을 우려하여 당연히 했어야 할 일본과의 전략 대화에도 소극적이었다. '민주화’된 제6공화국 '문민정권들’의 정책노선은 기본적으로 과거와의 투쟁이나, 포퓰리즘을 의식한 것이었다. 더욱 나쁜 것은 좌파정권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안보전략, 정책까지 좌경 민족주의의 포로가 되었다는 점이다. 요컨대, 한일 양국이 전략적으로 충돌하는 결정적 장면은 우선 김정일에 대한 인식과 대응에서 나타난다. 좌파정권의 反美, 대륙 지향은 필연적으로 중 관계에서도 韓日 양국이 충돌하게 하였다.


4. 북한문제에 대한 일본의 인식과 대응


작년 10월 김정일의 지하 핵폭발실험은, 일본의 안보전문가들에게는 "일본판 쿠바위기" 혹은 "일본판 9.11"과 같은 위협으로 받아들여진다. 일본사회에는 일본은 자국민을 대량 아사시켜가며 만든 김정일의 원폭과는 공존할 수 없다는 컨센서스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사회는 노무현 정권과 한국사회가 과연 김정일의 원폭을 제거하려는 의지가 있는 지를 확신할 수가 없다. 노무현 정권이 김정일이 핵폭발실험에 이르게 된 것이 미국에 책임이 있는 듯이 말하고 있고, '北核 제거’보다 '평화적 해결’을 더 강조하기 때문이다.


현재 한일 양국의 김정일(金正日)에 대한 국가적, 국민적 정서는 너무나도 다르다. 일본사회의 김정일에 대한 혐오감, 경계심은 냉전시대 한국의 反共이 무색할 정도다. 김정일에 의한 일본인 납치문제는 일본인의 국가의식과 인권, 동족애를 일깨운 역사적 사건이었다. 작년 9월에 출범한 아베 신조정권은 각료 전원으로 구성된 "납치문제대책본부"를 발족시켰다. 총리(수상) 자신이 본부장이다. 아베 총리는 김정일에게 납치된 자국민은 최후의 한명까지 구출하겠다는 결의를 재삼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아베 총리는 역대 총리 중 첫 전후세대 이지만, 납치된 자국민을 구출하기위해 싸우는 자세가 일본 국민들에게 평가 받아 젊은 나이에 총리가 될 수 있었다. 일본 의회 내에는 납치피해자를 구출하기 위한 국회의원 모임이 초당파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베 총리를 비롯한 각료들은 물론, 많은 일본 정치인들이 양복 깃에 푸른 리번을 달고 있다. 김정일에게 납치된 일본인을 구출, 탈환하자는 의지, 다짐의 표시인 것이다. 인도주의와 애국심과 동포 사랑의 상징이기도 하다. 아베 총리는 외국 방문 중에도 이 푸른 리번을 양복 옷깃에 달고 다닌다. 일본정부는 평양 측과 접촉하는 모든 기회에 납치된 일본인 구출 문제를 제기하도록 되어있을 정도다.


일본사회는 납북자와 탈북자 문제에서 보이는 한국정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겉으로는 표현을 자제하지만, 경멸적 태도를 감추지 않는 사람도 많다. 특히 한국 당국이 "6자회담"에서 일본 측이 납치일본인 문제를 거론치 못하게 방해하는 것으로 전해지면서 한국당국에 대한 이미지가 결정적 나빠지고 있다. 지난해 12월 민주당의 한 유력 의원은 노무현 대통령이 마치 김정일의 동생처럼 행동하고 있다고까지 언급했다.


작년 6월에 제정된 일본의 북한인권법("납치문제, 기타 북한당국에 의한 인권침해문제에 대한 대처에 관한 법률")은, 김정일에게 납치된 피해자들뿐 아니라, 탈북자도 보호, 지원토록 규정하고 있으며, 매년 세계인권의 날인 12월 10일부터 12월16일까지 1주일간을 북한의 인권침해실상을 알리는 주간으로 정했다. 모든 지방자치단체도 북한당국의 인권침해 실상을 알리는 일에 참여해야 하게 되었다.


지금 한국과 일본은, 金正日을 어떻게 보는가를 중심으로, 자국의 안보상 전략, 정책에서 충돌할 뿐 아니라, 탈북자 문제 등과 관련하여 인권문제, 가치관에서도 충돌하는 형국이 되고 있다. 납북자, 탈북자 문제로 한국이 인권 후진국 취급을 받게 되는 것이다. 원래 "동맹"이란 흔히 "공통의"을 상정함으로서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21세기 문명사회에서 동맹이란 "공통의 적"뿐 아니라, 가치관(자유, 인권, 자유주의 시장경제, 법치 등 보편적 가치)과 비전을 공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지금 한국과 일본은 "공통의 적"과, "가치관"과, "미래 비전"을 공유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느냐가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흔히 "공통의 적"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것을 우방(동맹)간의 신뢰, 신의의 표시로 받아들이지만, 지금 한일간에 일본이 원하는 김정일에 대한 정보(혹은 납치된 일본인피해자에 대한 정보 등)를 공유하는 분위기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일본사회의 보수화는 특히 안보분야에서 내외의 주목을 받아왔는데, 예전에 비해 정책결정과 법률화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빨라졌다. 일본은 금년 1월9일 방위청을 방위성으로 승격시켰다. 아베 총리는 올해 정기국회 중인 상반기에 "국민투표법" 제정을 목표로 하고 있다. 헌법 개정은 중의원, 참의원의 재석의원의 3분지 2이상의 찬성과 국민투표를 거쳐야 하는 데(일본 헌법 제96조), 일본은 아직 국민투표법이 없기 때문이다. 개헌을 위한 사전 조치로 국민투표법을 만들려 하는 것이다.


일본은 정보력(情報力) 강국을 지향하며, 국가안전보장회의 등 안보체제 정비를 서두르고 있다. 일본은 더 이상 김정일 체제의 對日 도발, 테러리즘과 불법 행위를 용인할 수 없다는 자세다. 노무현 정권은 유엔 안보리 결의 1718호를 무시하는 듯한 정책을 계속 고집하고 있지만, 일본은 일 북간 무역을 이미 사실상 정지시킨 상황이다.


일본에는 국제사회의 김정일 체제에 대한 압력과 제재가 한국의 좌파정권과 중국 때문에 무의미하다는 지적이 많다. 한국과 중국(北京)이 원폭 보유량을 늘여 가고 있는 김정일을 연명시키고 있다는 비난과 원망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온갖 불법공작에 관여하여 일본사회의 안녕을 위협하는 조총련을 재외동포로 비호하려는 한국의 좌파권력에 대해 우호적 감정을 가질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역사적으로 "특수관계"였던 韓日이, 어느 틈엔가 냉랭한 관계로 변한 것이다. 한국 국민들은 아직도 느끼지 못할지 모르지만, 일본사회에 한국에 대한 (식민통치에 대한) "속죄의식" 등은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일본의 보수파들은 한국의 좌경화에 대해 낙담하고 있다. 단기간에 기적적인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하여 자유민주주의 선진사회로 진입한 것으로 알고 있었던 우방 한국이, 월드컵 공동개최 후에 오히려 反日성향이 강해져 양국간 거리가 멀어지는 것을 보면서 한국에 대한 기대가 낙담으로 변한 것이다. 한국의 유권자들이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좌파 정치인들을 지도자로 선택한 것에 놀라고, 그 좌파정권이 한미동맹을 약화시키는 정책과 행동을 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특히 남북한이 민족공조를 외칠수록 일본사람들은 '한국이라는 방파제’가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다. 일본의 보수파 중에는 한국의 좌경화를 백촌강(白村江)의 패배(일본 사람들은 서기 660년 백제가 멸망하자, 일본은 백제를 구하러 663년 군사를 보냈다가 패배했다고 알고 있다)이래의 최악의 사태라고까지 말 하고 있을 정도다.


5. 한일 안보 협력관계의 재구축을 위해 '가치관 외교’의 활성화를 제안하는 일본


지금 현재 일본사회에서는 김정일과 김정일 체제에 대한 경계와 불신이 그대로 한국으로 전이, 확대되고 있는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일본 내에는 한국이 평양 및 북경과 연대, "反日 공동전선"을 편다고 극단적으로 반발하는 경향도 있다.


일본은 냉전종식 후 한일관계가 '특수 관계’에서 '일반관계(보통관계)’로 바뀌는 과정에서, 한국의 6개 공화국 정권들이 "허약해질 때"(레임덕, 식물정권 상태) 마다, 한일관계를 재조정하는 조치를 취해왔다. 노무현 정권에서도 이러한 조치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감정"이란 대개 시간이 흐르면 약해지고 잊혀지는 것이 정상이다. 시간이 흘러도 감정이 약해지지(잊혀지지) 않는다면, 아니 더욱 새롭게 반추된다면, 이것은 감정에 어떠한 "의지"가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反日감정"의 경우에도 이미 60 여 년 지난 만큼 "감정적 反日"은 극복되었고, 지금 제기되는 反日은 필요에 의한 "정치적 反日"이라는 측면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근 일본의 보수층 핵심에서는 안보문제를 기능적 사고에 의해 기능적 대응으로 해왔다는 데 대한 비난을 받아 온데 대한 반성에서 “가치관 외교” 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우리도 폐쇄적 가치관으로 고립을 자초할 것인지, 개방적 가치관으로 우리자신을 업그레이드 시켜 선진사회로 갈 것인지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노무현 정권이 남북정상회담에 기대를 걸고 있는 모양이다. 남북 정상회담은 필연적으로 미국, 일본과의 대결로 이어질 것이다. 노무현 정권의 남북 공조가 대한민국의 안보 토대를 허무는 결과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홍형 / 일본 와세다 대학 현대한국연구소 객원연구원, 전 주일 한국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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