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사회에서의 양자간 관계가 대체로 국내환경과 국제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전개되듯이, 감성과 이성이 얽힌 한·일관계도 양국의 국내여론, 역사적 유산, 양국의 주요 현안, 미국의 세계전략 및 동북아 전략 등의 영향을 받으며 전개되어 오고 있다.
본고에서는 일본내 염한론(厭韓論)이 확산되는 가운데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의 발표와 더불어 협력관계로 변모한 한·일 관계, 참여정부 등장 이후의 한·일 관계의 전개 등에 관해 살펴 본 뒤, 6·20 서울 한·일 정상회담에 관해 분석하고, 아울러 향후 한·일 관계에 관해 전망해 본다.
I. 염한론의 확산에서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에 의한 교류·협력의 틀 확보
한·일관계는 역사적 후유증에 의한 잠재적 갈등요소를 내포한 채 경쟁과 협력 관계를 지속시켜 오고 있는데, 탈냉전시대의 도래와 더불어 한·일 양국은 정상회담을 통한 미래지향적 관계 개선을 추구하였으나, 과거사 문제 및 독도 영유권 문제 등에 의한 갈등, 김영삼 대통령의 '일본 폄하’ 발언 등으로 인해 냉각상태를 맞이하여야 했다.
이후, 한·일관계는 일본 국내의 염한론의 확산 등으로 매우 악화되었고, 1998년 2월 '국민정부’의 등장을 계기로 개선되는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즉, 한·일관계는 1998년 10월 김대중 대통령의 방일과 '한·일 공동선언’을 계기로 개선되기 시작하였다.
「한·일 공동선언」의 서명과 더불어 한·일간에는 교류가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2000년에는 여러 차례의 한·일 정상회동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와 같은 정상회담의 개최와 그에 따른 양국 정상간의 신뢰구축을 바탕으로 한·일간에는 대북 정책공조 강화, 한·일 자유무역협정(FTA)의 체결을 위한 환경조성과 사전조치 합의, 동북아 다자간 대화기구의 추진 합의,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 및 '2002년 한·일 국민교류의 해’ 관련된 구체적 협력 논의 등이 이루어지고, 70억 달러의 대한 투자 유치 등 협력관계의 내실이 한층 강화되었다.
따라서, 한·일관계는 2001년에 역사 왜곡 교과서의 문부성 검정 통과 파문, 남 쿠릴열도 수역내의 꽁치조업 분쟁,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으로 인하여 다소 갈등이 야기 되고, 이로 인하여 사회 각분야의 교류가 위축되는 '악화된 상황’을 맞이하기도 하였지만, 한·일 정상회담 및 각료급회담 등을 통하여 관계 개선을 위한 기틀이 마련되었고, 정부간 수준의 관계는 보다 우호적이고 협조적인 관계로 개선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한·일관계는 2002년에 접어들면서 이와 같은 기틀을 바탕으로 한·일 장관회담의 개최 및 고이즈미 총리의 재방한 추진 등 '한·일 월드컵 공동주최’의 성공을 향해 상호협력관계의 구축을 도모하면서 한층 진전되었다.
2002년 3월의 김대중 대통령-고이즈미 총리의 서울 정상회담에서는 월드컵 성공적인 개최를 위한 협력을 비롯하여 한·일관계 전반에 대한 평가 등 양국간 협력방안, 한반도 평화와 안정 및 국제무대에서의 협력문제 등을 폭넓게 협의하였고, 6월의 월드컵 공동개최를 앞두고 한·일 양국간에는 다양하고도 활발한 교류가 전개되었다. 특히, 한국의 4강 진출, 일본의 16강 진출 등 성공적인 월드컵 개최를 계기로 양국 국민수준의 한·일관계는 매우 성숙된 단계로 진전되었다.
이와 같은 한·일 양국 국민들의 상호이해의 성숙 및 활발한 교류와 더불어 정부간 차원의 협력도 보다 긴밀하게 전개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7월 1일 월드컵 폐막식에 참석차 방일한 고이즈미 총리와 가진 정상회담에서 한·일 양국 정상은 월드컵 이후의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의 증진을 비롯하여 대북 포용정책을 위한 한·일공조, 경제·통상협력의 증진 등에 관해 심도있게 협의하였고, 고이즈미 총리도 김정일 위원장과의 정상회담 직후, 9월 18일 김대중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북·일 정상회담의 개요를 설명하면서, 남북대화의 중요성 및 대북 포용정책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고, 나아가 10월 26일 멕시코 APEC정상회담 도중에 가진 한·미·일 정상회담에서는 북한 핵문제 관한 한국의 입장을 대변하여 미국을 설득하기도 하였다.
요컨대, 한·일관계는 역사문제로 인한 한국내 반일감정의 토양속에도 월드컵 공동개최를 계기로 젊은 세대간 대등한 파트너 의식의 조성과 더불어 한층 성숙되어 가고 있는 양상을 나타내었다.
II. 참여정부 등장 이후의 한·일관계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월드컵 공동개최를 계기로 한·일 양국 국민간 우호분위기가 고조되고, 다양한 교류를 바탕으로 상호 이해의 폭을 넓히면서 보다 성숙된 단계로 접어들었던 시점에서 한국의 참여정부가 등장하였으므로, 2003년 2월 25일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식에는 일본의 다수 지도층 인사가 보다 성숙된 한·일 관계를 배경으로 참석하였으며, 취임식 직후에는 청와대에서 한·일정상회담이 개최되기도 하였다.
이후 한·일간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방일에 따른 도쿄(東京) 정상회담을 비롯하여 ASEAN+3 정상회담, APEC 정상회담 등에서의 정상회담이 개최되었고, 아울러 5차례 이상의 외무장관급 회담이 열렸다. 즉, 2003년의 한·일관계는 비록 역사왜곡 발언 등이 있었지만 비교적 성숙된 관계로의 발전을 지향한 우호관계가 지속되었다.
한·일정상회담 등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2003년 2·25 서울 한·일정상회담에서는 대북정책에 관한 의견교환과 더불어 한·미·일 공조에 의한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이 확인되었으며, 미래지향적 한·일관계의 발전을 위한 상호노력 등이 심도 있게 협의되었다. 6·7 도쿄(東京) 한·일정상회담에서는 북핵 문제와 동북아 정세, 양국간 실질적 협력과 인적 교류 확대 방안, 국제무대에서의 협력 증진 방안 등에 관해 폭넓은 협의가 이루어졌으며, 나아가 공동성명에서 고이즈미 총리는 한국정부의 '평화번영정책’에 대해 지지를 표명하였고, 노무현 대통령은 북·일 평양선언을 바탕으로 핵·미사일·납치문제 등 현안을 해결하고 동북아 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이바지하는 형태로 북·일 국교정상화를 실현한다는 일본정부의 기본방침을 지지하였다. 아울러, 공동성명에서 양국 정상은 북한 핵문제가 한반도뿐 아니라 동북아 지역의 평화 및 안정, 국제적 핵 비확산 체제에 심각한 위협이라는 인식을 공유할 것을 표명하였고, 양국간 동반자적 관계의 발전을 위한 양국간 교역의 확대 및 산업협력, 한·일자유무역협정(FTA)의 조기체결을 위한 노력, 미래를 향한 한·일협력의 강화 방안으로 상호이해의 제고를 위한 활발한 인적·문화적 교류, 한·일간 일일 생활권 조성을 위한 노력 등을 강조하였다. 10월 8일 인도네시아의 발리 ASEAN+3 정상회담 기간 중에 가진 한·일정상회담에서는 6자회담 등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협력, 6·7 도쿄(東京) 공동선언의 착실한 이행을 위한 노력 확인 등에 관해서 폭넓게 논의되었으며, 10월 21일 태국의 방콕에서 개최된 APEC 정상회담 기간 중 가진 한·일정상회담에서는 양국간 경제협력 및 인적 교류 증진을 위해 한·일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교섭의 개시, 한·일 사회보장협정의 실질 합의, 한·일 세관 상호지원협정의 조기 체결 추진, 양국간 일일 생활권의 조성을 위한 노력 강화 등에 합의하였다(<표1>참조).
그러므로, 2003년 5월 31일 아소 다로 당시 일본 자민당 정무조사회장의 창씨개명 정책 발언, 12월 28일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東京都)지사의 한·일합방의 정당화 발언 등 소수의 우익·보수 정치인들은 과거사 망언이 있었지만, 한·일관계는 한국의 신정부의 출범과 함께 정상회담, 장관급 회담 등이 정부간 차원의 고위급 교류뿐 아니라 민간차원에서도 정책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일본 국내의 한류열풍으로 일본인들의 한국에 대한 우호적인 관심 및 분위기는 한층 고조되었다. 즉, 겨울 연가, 가을 동화 등 TV드라마를 비롯한 한국 대중문화가 일본국민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한국음식, 한국어 공부 등에 관한 일본인들의 관심이 매우 높아졌고, 일본 국민들의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상당히 좋아지면서 일본의 중년 여성들을 비롯한 일반 국민들의 한국에 대한 호감은 매우 높아졌다.
이와 같은 분위기속에서 2004년 7월 21일 제주도의 서귀포에서 노무현 대통령-고이즈미 총리의 정상회담이 개최되기도 하였다. 한·일 서귀포 정상회담에서는 특히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양국 협력의 강화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되었고, 2005년의 한국인에 대한 일본의 비자면제에 이어 한·일간의 항구적 비자면제 문제도 언급되었으며, 나아가 노무현 대통령의 일본 스스로의 과거사 문제 해결이 언급되었다(<표1> 참조).
이처럼, 한·일 관계는 역사문제로 인한 잠재적 갈등의 토양 속에서도 보다 성숙된 우호관계를 지향해 가고 있었다.
<표1> 참여정부 출범 이후의 주요 한·일정상회담
도쿄 한·일정상회담 (2003. 6.6-9.) | - 공동 성명 발표 ㅇ 북핵문제 평화적 해결 발표 ㅇ 자유무역협정(FTA)체결 추진 ㅇ 한국인의 일본 비자 면제 문제 협 의 |
제주 서귀포 한·일정상회담 (2004. 7.21-22.) | - 공동 기자 회견 ㅇ FTA 체결 추진 ㅇ 이라크 임시정부 조기정책을 위한 국제협력 ㅇ 한·일간 교류확대 ㅇ 노무현 대통령, “내 임기동안 과거사 문제 꺼내지 않겠다”고 언급 |
일본 큐슈 이브스키 한·일정상회담 (2004. 12.17-18) | - 공동 기자회견 ㅇ FTA 체결 추진 ㅇ 이라크 지원 문제 협의 ㅇ 김포-하네다 간 항공편 증편 ㅇ 일본 입국 비자 임시 면제 등 교류 협력 확대 |
그러나, 2005년에 접어들어 한·일관계는 시마네(島根)현 의회의 '다케시마(독도)의 날 제정’ 및 독도영유권 문제, 일본 정부의 왜곡 역사 교과서 검정 통과 등으로 한·일관계는 급속히 냉각되면서 심각한 수준으로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일본의 시마네현의 의회가 3월 16일 '다케시마(독도)의 날 제정’을 제정하자, 한국정부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일본의 과거 침탈을 정당화하는 행위로 규정하면서 <표2>와 같은 독도 문제 및 역사 왜곡에 단호히 대처하겠다는 내용의 대일 외교 4대 기조와 5대 방향을 담은 신 독트린을 발표하였다. 이어 3월 23일 노무현 대통령은 초강경 어조의 대일 비판을 내용으로 하는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통하여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시마네현 의회의 '다케시마(독도)의 날 제정’, 역사 교과서 왜곡 등을 조목조목 비판하였다.
한·일관계는 갈등의 증폭과 더불어 악화된 상태에서 긴장이 제고되고, 이와 같은 과거사 문제를 둘러 싼 갈등은 한·일간의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중일간의 영토 영유권 문제·지역 패권 경쟁 등의 불씨와 얽혀 중국 대륙 전역에 격한 반일 시위로 증폭되었다.
<표2> 3·17 한국정부의 대일 독트린의 4대 기조와 5대 방향
4대 기조 | 5대 방향 |
ㅇ 인류보편적 가치와 인식에 기초한 한·일관 계 구축 ㅇ 일본의 독도, 과거사 문제제기는 식민지 침탈 정당화, 단호 대처 ㅇ 우리 대의를 국제사회에 당당히 밝히고, 일본의 태도 변화 촉구 ㅇ 기존 정치 외교적 교류 지속, 경제, 사회, 문화 및 인적 교류 증진 | ㅇ 독도 영유권 확고히 수호하는 조치 취할 것 ㅇ 시대착오적인 역사왜곡 바로잡기 위해 모든 가능한 수단 동원 ㅇ 일제 피해자 문제, 일본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다는 인식 필요 ㅇ 이웃나라 신뢰가 유엔 등 국제사회 지도국 되는 일본의 첫걸음 ㅇ 인적 문화적 교류 지속, 시민사회간 네트워크 강화 |
III. 6·20 한·일정상회담과 향후 한·일관계 전망
2005년 6·20 서울 한·일정상회담은 양국이 국교정상화를 한지 40주년이 된 해에 개최되었지만, 독도영유권 문제, 일본 정부의 왜곡 역사 교과서 검정 통과 등으로 한·일관계가 급속히 악화됨에 따라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최대 현안이었던 독도 문제는 '우리영토를 불필요한 논란거리로 만들지 않겠다’는 한국 측 의도에 따라 의제에서 빠졌고, 따라서 양국 정상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역사 인식 및 역사교과서 문제 등에 관해 솔직한 의견을 교환하였으며, 나아가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관해 논의하였다.
그 결과,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이를 위한 한·미·일 3국의 외교적 공조원칙의 재확인, 차기 정상회담의 연내 일본에서의 개최 합의 등은 이루어졌지만,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역사교과서 왜곡 시정문제 등 주요 과거사 현안에 대해서는 현격한 인식의 차이만 확인되었을 뿐 합의는 도출되어 나오지 못했다. 즉, 노무현 대통령은 '철저한 과거사 인식’을, 고이즈미 총리는 '평화에 대한 의지’를 강조했다고 하는데, 한·일 양국의 주요 3대 현안인 독도영유권 문제,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역사교과서 왜곡 시정문제 등은 그대로 남게 되었고, 노무현 대통령의 표현처럼, 제2기 역사공동위원회 발족 및 산하에 교과서연구위원회 신설 등 '낮은 수준의 합의’만이 이루어졌으며, 따라서, <표 3>과 같은 공동발표가 나왔다.
<표 3> 6·20 한·일정상회담 결과의 공동발표 주요내용
- 공동 기자 회견 ㅇ 제2기 역사공동위원회 발족 ㅇ 야스쿠니 신사 대신할 제3의 추도시설 건립 검토 ㅇ 김포-하네다 간 항공편 1일 8편으로 증편 ㅇ 한국인 강제 징용자 유골 반환 |
이와 같은 6·20 한·일정상회담에 대해 한국의 언론들은 '역사 인식차만 확인’(중앙일보, 6.21), '풀지 못한 넥타이처럼 풀지 못한 한·일 인식차’(동아일보, 6.21), '젓가락 들기도 무거웠던 만찬’(조선일보, 6.21), '한·일 입장차만 확인’(한겨레, 6.21), '과거사 이견 못 좁혀’(세계일보, 6.21) 등으로 평가하였고, 일본 언론들은 '역사인식의 간극 메우지 못함’(아사히 신문, 6.21), '양측 주장의 평행선’(마이니치 신문, 6.21), '역사에 관한 간극 해소 실패’(요미우리 신문, 6.21), '진지한 의견교환은 이루어졌지만, 합의보다는 간극’(교도통신 6.21) 등의 표현으로 평가하였다. 아울러, 일본 언론은 합의사항에 포함된 새로운 추도시설 건설에 대해서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돼 있는 A급 전범을 어떻게 할지에 대한 언급이 없는데다 '일본의 여론과 제반사정을 고려한다’는 조건이 붙어있어 반드시 하겠다는 약속이라고 보기 어려우며, 따라서 실현여부가 불투명하다고 지적했다(아사히 신문 6.21자 사설 등).
따라서, 향후 한·일관계도 과거사 문제라는 잠재적 갈등의 불씨를 내포한 채 감성과 이성의 얽힘 속에서 전개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런데, 21세기의 한·일 관계는 (1) 미국의 신 군사전략 및 주일미군의 재편과 미일동맹의 강화, 그에 따른 (2) 국제사회에서의 일본의 전략적 역할 강화, (3) 세계화와 블록화가 전개되는 경제 환경 속에서의 한·일 FTA 체결 문제, 등으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즉, 한·일관계의 개선 및 강화는 양자 차원 및 다자 차원에서 한국의 국익에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향후 한·일관계의 진전을 위해서는 양국 국민차원의 역사문제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바탕으로 상호신뢰 관계를 제고하면서, 21세기 미국의 신군사전략에 따른 한·일 안보협력,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북한 개혁·개방을 위한 협력, 동아시아경제권의 구축을 위한 경제협력 등 주요 정책에 관한 협력 등이 요구된다.
그러므로, 한국으로서는 지일(知日)->용일(用日)을 지향하는 전략적 입장을 견지해야 하고, 일본의 국력에 대한 냉철한 평가 및 국가전략에 관한 분석을 바탕으로 한 대일 전략적 대응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며, 아울러 이를 위한 대일 전략 기획 및 정책 역량의 강화에 노력을 경주하여야 할 것이다.
배정호 /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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