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2004년 3월 12일 대통령탄핵안 국회 가결로부터 4·15총선을 거쳐, 헌법재판소의 탄핵안 최종 결정에 이르기까지, 한국정치는 숨고를 여유조차 없는 격랑(激浪)을 맞고 있다. 4·15총선 결과와 헌재(憲裁)의 판정 여하에 따라 한국사회는 엄청난 소용돌이에 휘말릴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오히려, 어떤 결과나 결정이 나오더라도 엄청난 후유증을 피할 수 없으리라는 진단이 보다 설득력이 있다.
이처럼 정치적 격동기에, 북한동향에 커다란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우리와 무력대치하고 있는 북한의 군사동향 여하에 따라 대한민국의 국가안보 상황이 결정적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국가안보는 공기 중의 산소나, 집으로 말하면 울타리에 비유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것으로서, 우리 삶을 근본적으로 보장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 '울타리’ 안에서 정치, 경제, 문화, 복지 등 모든 다른 형태의 삶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울타리를 튼튼히 해야 한다. 모든 나라들이 국가안보를 국정과제의 제1순위로 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9·11이후 미국의 대외정책 변화와 대응방식을 보면, 미국이 국가안보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지를 알 수가 있다. 테러의 근원을 소탕하기 위해 멀리 이라크까지 나아가 군사작전을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 북방 수십km에 중(重)무장한 적(敵)을 두고 있는 우리의 경우, 국가안보의 중요성에 대해 더 이상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현재 북한동향에 대하여, 이산가족 등의 인적(人的) 교류나 개성공단 사업 등 경제교류 등에 대하여는 많은 보도가 있고 국민적 관심을 끌고 있으나, 정작 우리의 안보에 직결되는 북한의 군사동향, 곧 재래식 군사력, 핵·생물화학무기·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 김정일 정권의 대남정책 목표, 대남선전 실태 등에 대하여는 특별 기획보도 같은 것이 별로 없고, 대국민 홍보가 잘 안되고 있는 편이다. 그리하여 국민들은 국가안보 개념이 크게 피부에 와 닿지 않고 있다. 총선에서 안보 문제가 이슈화되지 않는 것을 보면, 우리 국민의 안보정세 인식의 정도가 매우 낮은 것을 알 수 있다. 또 북한의 위협과 국가안보를 논(論)하면, '수구’라고 하고 '색깔’논쟁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국가안보의 중요성을 이야기 하면, “그럼, 북한을 자극하여 전쟁하자는 것인가?”라고 억지를 부리니,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3월 29일자 아시아 월스트리트 저널의 한 칼럼은 바로 이러한 한국의 현상황을 냉철하게 지적하고 있다.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하고 더 많은 핵무기를 제조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은 북한의 위협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북한은 주적(主敵)이 아니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최근 보이고 있는 북한의 대남정책 목표와 군사동향, 그리고 대남선전공세 등을 요약·정리해 본다.
2. 북한의 국가목표와 대남정책목표
일종의 병영국가로서 북한의 국가목표는 군사정책 목표에 잘 반영되어 있고, 이들 정책들은 대남정책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수십년간 유지되어 온 북한의 한반도 적화정책은 지금도 변하지 않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1990년대 초·중반 북한경제가 침체하고 식량난이 가중되면서, 북한의 이러한 국가목표 내지 대남정책 목표가 근본적으로 변화한 것이 아닌가 하는 분석이 국내외에서 제기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곧 북한이 '체제생존 전략’이나 '외부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한 방어전략’ 등으로 대남전략 개념을 수정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체제에 대한 보다 깊은 성찰(省察)은 이러한 북한 대남전략에 대한 새로운 개념설정 시도가 사실에 기초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북한은 극심한 식량난에도 불구하고 군(軍)만큼은 특별관리하고 있으며, 수백만의 민간인 아사자(餓死者)가 발생해도 끄떡하지 않고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계속하고 있는 독특한 군사·병영국가이기 때문이다. 경제난, 식량난의 심화현상을 토대로 북한의 대남전략 변화를 곧바로 가정해서는 안된다. 북한체제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 북한에서는 거의 모든 시설이 이미 지하화(地下化)하여, 미국의 첨단 위성정찰로도 그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최근 남한의 매우 혼란스럽고 유동적인 정세변화와 맞물려, 북한의 움직임이 주목되고 있다. 북한 핵문제와 관련, 작년 이라크 전쟁 직후 보여주었던 북한의 양보적이고 협상순응 자세는 금년 6자회담 2차회의를 전후하여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에서 고전(苦戰)하는 모습을 보이고, 美대선이 눈앞에 다가왔으며, 한국의 국내정세가 그들에게 일종의 '호기(好機)’를 제공해주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판단하는 이러한 유리한 국면에서, 북한은 “핵억제력” 강화를 부르짖으며, 김정일은 연일 군부대를 시찰하여 군(軍)의 사기를 독려하고 다닌다.
2004년 들어서서 김정일정권이 가장 강조하고 있는 것은 “선군(先軍)정치”(Military First Policy)이다. 선군정치란 군을 최우선시하며, 군을 앞세워 국가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자세이다. 선군정치에 따라, 북한 국내총생산의 3분의 1이 군대로 투입됨으로써, 가뜩이나 어려운 북한주민의 생계를 더욱 위협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북한에서는 명실공히 군과 국가는 동일시되며, 군대는 곧 김정일의 군대로 간주된다. 특이한 점은 혁명의 주체로서 더 이상 노동계급이 거론되지 않고, 군대를 혁명의 주력군으로 삼는 이론정립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곧 군대를 혁명의 주요 요소로 삼는 선군혁명의 이론인 것이다.
과거에는 “군대를 한갓 정치의 수단으로 여겼지, 정치를 주도해 나가는 역량으로 보지 못했다”면서, 군대에게 새로운 혁명 임무를 부과하고 있다. 북한은 과거 노동계급 중심의 혁명 이론을 “교조주의적”인 것으로 배격하면서, “인민 군대는 사회주의 발전을 주도하는 핵심이며, 온 사회가 따라 배워야 할 본보기”라고 주장함으로써, “선군후로(先軍後勞)” 개념을 정당화하고 있다.
3. 북한의 군사동향
현재 북한의 군사력과 대남 군사위협은 대략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압축되어 설명될 수 있다: 곧 재래식 군사력, 대량살상무기(핵, 생물·화학무기, 단거리 미사일, 장거리탄도미사일), 특수부대, 대남 전진배치로 인한 지역적 근접성(近接性) 등이다.
김정일정권이 남한의 우월한 경제, 한·미 동맹의 견고성, 이라크에서 보여준 미국의 첨단무기 위력 등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최근의 한반도정세 변화가 그들의 군사전략을 보다 공격적인 것으로 만들 소지가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곧 한국사회 내부의 혼란 및 동요와 한·미 동맹의 약화가 가장 큰 요인이다.
북한의 재래식 군사력은 약 117만에 달하는 정규군과 5백만을 넘는 예비군대로 구성되어, 세계 제5위를 랭크하고 있다. 북한의 지상군은 8개의 보병군단, 4개의 기계화군단, 1기갑 군단, 그리고 2개 포병군단으로 구성된다. 해·공군은 9만2천명의 공군력과 1천7백여대의 항공기, 그리고 4만6천여명의 해군력과 800여척의 함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제는 12만 2천여명으로 구성된 세계최대 규모의 특수부대(SOF: Special Operations Force)이다. 이들은 고도로 훈련되어 있고, 충성심이 강한 조직이다. 이들의 규모는 최근 증가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평양-원산을 잇는 선(線) 이남 지역에 지상군 전력의 70% 이상이 집중배치되고 있어, 언제든지 남한에 대한 기습공격이 가능하다. 수도권은 물론 한반도전역이 북한군의 집중 포화에 노출되고 있다. 수도권 지역에 대한 장사포 위협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북한은 이미 핵무기를 1~2개 확보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미 파키스탄과 공동 핵실험을 했을 수도 있다는 추정 평가도 있다.
또한 핵무기 여러개를 생산할 수 있는 10~12kg의 플루토늄 및 그 생산능력을 보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이 고농축우라늄(HEU)을 이용한 핵무기 프로그램을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는 것은 거의 확실시된다. 아울러, 2500~5000t의 화학무기와, 생물무기의 경우 탄저균, 천연두등 13종 세균을 보유하고 있어 가히 위협적이라 할 만하다. 특히, 남한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500여기의 SCUD 단거리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 우리 언론에서 주로 장거리 탄도미사일만 언급되고 있으나, 한국의 입장에서는 단거리 미사일의 위협이 더 크다고 해야 할 것이다. 2003년도 실제 북한군사비는 한국군사비의 40%에 달하는 50억 달러에 육박하였다. 이는 북한의 일반 물가·생계 지수를 고려할 때, 엄청난 수준이다.
정리해 볼 때, 북한의 군사적 위협은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경제침체에도 불구하고 가공할 만한 것으로 평가된다. 북한은 심각한 경제난으로 장기전 수행능력은 떨어지나, 단기 속전속결 능력은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북한의 이러한 군사적 위협을 억지하고 있는 것은 주한미군으로 보완되고 있는 한·미 연합방위력이다. 주한미군 재배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재, 향후 한·미 연합 방위력에 어떠한 영향이 있을지 재평가하고, 이에 대비하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4. 대남선전공세
북한이 2002년 신년 공동사설에서 '민족공조’란 용어를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이래, '민족공조론’ 또는 '우리민족 제일주의’는 북한 대남선전공세의 핵심 개념이 되고 있다. 민족공조는 한마디로 그 대치개념인 한·미공조 또는 국제공조를 타파하고, '반미·자주’로서, '조선민족’이 단결하여 외세인 미국에 남북한이 함께 대항해 나가자는 것이다.
특히 북핵 위기를 남북간의 갈등이 아닌 미·북 갈등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미·북 갈등을 넘어선 남북한 '조선민족’ 전체와 미국간의 갈등 및 대결로 상정하고, 이에 동참할 것을 남한 국민들에게 선동하고 있다. 이러한 북한의 가공할 대남선전공세는 최근 '촛불시위’로 대변되는 반미감정의 확산과 맞물려 젊은 계층에 일정 부분 설득력을 보이고 있어 크게 우려되고 있다.
2004년 들어서서 북한은 선군정치와 민족공조 외에 반미성전(反美聖戰), 6·15공동선언 구현 등을 첨가한 5개항목을 새롭게 제시하면서, 남한 당국과 정치인에게 '민족공조’의 길에 들어설 것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주목되는 것은 과거와 달리, 민족공조로 대변되는 대남 통일전선전술에 남한 당국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3·12 탄핵 이후, 탄핵을 친미 보수세력의 작품으로 몰아 붙이며, 반미 선전공세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3·12 탄핵 이후 4·15 총선을 앞두고 북한의 대남 선전공세가 활발해지고 있는 바, 그 주요 내용을 보면, 거의 자유·우익 정치세력을 비판하고 북한에 우호적인 친북·좌익 정치세력의 지지를 남한국민들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들이다. 2003년 9월 북한이 자체 분석한 정세보고(조선로동당출판사가 발간한 「간부 및 군중 강연자료」)를 보면, 한반도정세를 북한지도부가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생생하게 알 수 있는 바, 6·15 '북남 공동선언’ 이후 남한에서는 “반공보수세력에 비해 친북련공세력이 력량상 우세를 확보”했고, “반공보수세력이 사회의 기슭으로 밀려나고 진보적 운동세력들이 주류로 등장”하여 “권력의 칼자루를 잡았다”는 내용 등이 있어 주목을 끈다.
핵문제에 관하여서도,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전보다 강경해지는 모습이 주목된다. 북한은 6자회담 2차회담(2.25∼28, 베이징) 이후, 한·미 합동군사훈련 등을 거론하며, 한반도 '핵전쟁 위험’을 부각시키면서 '핵억제력’ 강화를 잇달아 천명하는 등 대미 강경태도를 보이고 있다. 또 각종 언론매체를 통해 북한은 미국의 이지스 구축함 東海 배치 계획을 '대북 핵선제 공격전략에 따른 군사적 조치’라고 비난하면서, “조선반도에서 전쟁을 막는 길은 핵억제력을 백방으로 다지는 데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함께 북한은 미국의 북핵 원칙인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핵폐기’(CVID) 요구에 대해, 북한의 핵억제력을 빼앗아 무장해제시킴으로써, 북한 사회주의 제도를 전복시키려는 것이라고 반발하며, “수용 절대불가” 입장을 밝히고 있다.
5. 한반도 정세변화와 우리의 대응
만물이 그렇듯이 세계정세도 시시각각 변화한다. 동북아시아 한반도 주변정세도 최근 크게 요동치고 있다. 현재 한반도 안보정세 변화를 견인하는 세 가지 주요 동인(動因)은 (i)북한의 핵개발, (ii)주한미군 재배치, (iii)남한 내부의 혼란과 분열 등이다.
무엇보다도 남한 내부의 이념적 대립과 갈등이 한·미 동맹의 약화를 초래하고, 특히 친북성향의 정치세력이 정치전면에 부상할 때, 북한의 대남도발 의지를 유혹할 수 있다는 점이 크게 우려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북한은 남한과의 각종 교류·협력 강화를 통해 미국에 대항하는 공동전선을 구축하려 시도하고 있다. 이것이 최근 북한으로 하여금 대미 강경자세를 보이게 하는 한 요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의 대량살상무기와 인권 문제 등에 대하여 조금도 양보할 자세가 없어 보인다.
최근 미국은 이러한 북한의 양동적인 대남전략에 대응하여, 한국내 군사력을 보완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다. 휴전선에 110억 달러에 달하는 PAC-3 미사일 배치를 완료했고, 앞서 언급한 바 동해에는 이지스 구축함을 배치하였다. 괌에 장거리 폭격기와 핵잠수함이 배치됐고, 주한미군 재배치와 아울러 일본을 동북아 지역에서 미군의 주요 거점으로 활용할 태세를 보이고 있다.
이는 주한미군 재배치 과정과 맞물려 이루어지는 미국의 새로운 움직임으로서, 우리는 다시 한번 한·미 동맹을 강화하고, 내부 혼란을 극복하여, 향후 있을 수도 있는 북한의 도발의지를 사전에 분쇄해야 할 것이다.
홍관희 / 통일연구원 평화안보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