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김시래.염태정.강병철 기자] SK 그룹의 이승희 법무지원팀 부장은 요즘 계열사에 법률 자문을 할 때마다 "어떤 결정을 하든 반드시 사회적 책임을 고려하라"고 조언한다. 그 계기는 법원의 'SK 비상장 주식 맞교환'사건에 대한 배임 판결이었다.
SK 그룹 오너인 최태원 회장은 2002년 자신 소유의 워커힐 비상장 주식을 계열사인 SK C&C 소유의 SK(주) 주식과 맞교환했다.
SK 측은 상속세 및 증여세법의 규정대로 워커힐 주식을 평가해 교환했다고 밝혔다. 비상장 주식은 별다른 기준이 없어 상속세법 등에 따라 주식가치를 산정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게 SK 측의 주장이다. 이부장은 "당시는 '법대로' 지켰기 때문에 위법이 아닌 줄 알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법원의 판단은 그게 아니었다. 서울지법은 지난해 6월 SK에 대해 "대주주에게 유리한 비상장 주식 가격산정은 '사회적으로 용인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는 요지의 판결을 내렸다. 서울지법의 김상균 부장판사는 "사회적으로 용인할 수 있는 범위란 개개 사건의 특성에 따라 다를 수 있다"며 "SK의 경우 거래 방법과 주식가격 산정 등을 보면 그 정도를 벗어난 것으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SK그룹의 경우 59개 계열사 가운데 비상장회사가 48개나 된다. 대부분 초기 벤처사업 성격이 강해 경영목적상 주식 변경 등도 잦을 수밖에 없다는 게 SK 측의 설명이다. 마찬가지로 국내 주요 대기업은 비상장 계열회사가 적지 않다. 이는 SK그룹만의 상황이 아니라는 얘기다.
기업 스스로 엄격해져야=삼성전자는 1994년 비상장법인인 삼성종합화학의 주식 1천만주를 주당 1만원에 인수했다. 그런데 삼성전자는 8개월 만에 계열사인 삼성건설과 삼성항공에 주당 2천6백원에 다시 팔았다. 법원은 이를 두고 '지나치게 빨리, 시세보다 싸게 팔아 회사에 손해를 입혔다'고 책임을 물었다. 자유기업원의 박양균 법경제실 선임연구원은 "'지나치게 빠른'이라는 애매한 기준이 기업한테 불리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반도체칩 업체인 J사는 1996년 미국 회사와 국내독점판매 대리상 계약을 맺었다. 이들 회사는 분쟁이 발생할 경우 관할 법원을 미국 회사의 본점이 있는 캐나다 온타리오주 법원으로 하기로 합의하고 이를 계약서에도 명문화했다. 그러다 미국회사는 2001년 계약해지 의사를 이메일과 문서로 보냈다. 이에 J사는 독점판매권을 침해받아 손해를 봤다며 국내 법원에 소송을 냈다. 그러나 미국회사는 법원 관할 합의를 위배한 것이라고 항변했다. 그렇지만 서울지법은 대부분의 계약 행위가 한국에서 이뤄진 점 등 종합적인 상황을 보면 우리 법원이 관할하는 데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경영 관행에 잇따라 쐐기=삼성물산은 그룹 계열사의 사채와 어음을 사는 것은 부당 지원이 아니라 재무. 투자활동이라며 소송을 냈다. 그러나 서울행정법원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룹 계열사에 유리한 거래를 '부당 자금지원'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세무서가 삼성물산에 관련 세금(법인세)을 매긴 것은 마땅하다고 판결했다. 계열사 지원에 대한 법적 그물망이 훨씬 촘촘해진 셈이다.
기업들 이중대표소송 비상=서울고법은 지난해 8월 이중대표소송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원래 대표소송은 기업의 임원 등이 회사에 손해를 끼쳤을 때 발행주식 총수의 1백분의 1이상을 가진 주주가 소송을 내는 것을 말한다. 소송에서 이겨도 배상액은 주주에게 가지 않고 회사에 반납될 뿐이다. 이중대표소송이란 모회사의 주주가 자회사의 경영진을 상대로 소송을 할 수 있는 권리다.
지주회사이자 모회사인 H사의 한 주주는 2002년 자회사인 부동산업체 S사의 경영진에 대해 업무상 횡령 등을 이유로 대표소송을 냈다. 1993년 회사가 자금조달을 할 필요가 없는 등 장외등록할 이유가 없는데도 장외등록 했다는 게 소송 내용이다. 또 회사의 중요한 영업 양도에 해당하는 주식을 저가 매도 할 때 주총의 특별결의가 필요한데 이를 무시해 회사에 89억여원의 손해를 입혔다는 게 소송 내용이다.
법원은 장외등록과 주식매도는 적법한 절차로 인정했다. 그렇지만 모회사와 자회사의 경영권을 모두 장악한 대표이사인 K씨에 대해서는 이중대표소송을 인정해 업무상 횡령으로 5억7천만원을 손해배상토록 했다. 법원은 소송을 낸 사람이 자회사의 주식을 갖고 있지 않은 점 등을 언급하며 이중대표소송의 논란도 있음을 거론했다. 그렇지만 법원은 이중대표소송을 인정하지 않으면 자회사를 통한 경영진의 부정행위를 막을 길이 없다는 취지의 판결을 했다.
자유기업원 관계자는 이와관련해 "대표소송을 낼 수 있는 사람은 그 회사의 주주여야 한다'는 경제원칙을 벗어나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며 "법원이 이중대표소송을 인정함으로써 앞으로 소송이 남발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서울고법의 이성룡 부장판사는 "재계 주장처럼 판결이 난 뒤 소송이 남발한 일은 없었다"며 "주식회사 제도가 발달한 미국은 3중 대표소송까지 가능하다"고 말했다.
따라서 기업들은 이같은 법원의 이중대표소송 인정 방침에 대비해야 할 것으로 분석됐다. 법원이 기업. 대주주의 잘못된 경영상 편법 행위 등은 앞으로 좌시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김시래.염태정.강병철 기자 sr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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