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우남 이승만, 조선의 개화 꿈꾼 혁명 운동가

자유경제원 / 2016-02-22 / 조회: 6,135       미디어펜
우남 이승만이 100년 전 한반도에 가져다 준 첫 번째 선물은 바로 ‘자유주의 정신’이었다. 왕이 나라를 다스리던 조선시대, 그리고 이어진 일제시대 사람들에게 ‘자유’는 생소한 개념이었다. 당시 한반도에 ‘자유주의 정신’은 어떻게 상륙하게 되었을까. 자유주의는 위대한 국가탄생의 서막이었다. 자유경제원은 지난 15일 ‘이승만과 그의 저서, 자유주의 정신이 상륙하다’ 세미나를 통해 이를 풀어보았다. 


발표자로 나선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는 “독립정신은 우남이 수감생활 6년차에 그동안 감옥에서 생각하고 고민하고 공부한 것을 다듬어 풀어 낸 역작”이라며 “수백 년 전제정치에 찌들어 자기가 노예라는 사실조차 망각한 조선의 백성들을 기독교 정신으로 개화시키고 서양의 정치제도와 법률을 받아들여 내정 개혁을 단행해 조선의 독립을 보장받자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남 교수는 “우남의 사상을 1904년에 그대로 잡아두면 안 된다”고 밝혔다. 아래 글은 남정욱 교수의 발제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이십 대 열혈 운동권이 풀어 쓴, 한나절이면 이해하는 자유주의 독립 정신


‘독립정신’이 실은 자유주의 보급 도서?


어려운 것을 어렵게 쓰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어려운 것을 쉽게 쓰는 게 잘하는 글쓰기다. 가끔 쉬운 것을 어렵게 쓰는 사람도 있다. 인간이 아니다. 한글의 위대성은 아무리 무식한 인간도 한나절이면 깨칠 수 있는 습득의 용이성에 있다. 우남 이승만이 쓴 <독립정신>의 위대성은 그렇게 한나절 만에 글을 배운 사람이 또 한나절만 읽으면 이해할 수 있는 자유주의 입문서라는 점에 있다. 칭찬할 것이 널렸지만 특히 그 점에서 <독립정신>의 미덕은 빛나고 또 빛난다.


 <독립정신>은 우남이 수감생활 6년차에 그동안 감옥에서 생각하고 고민하고 공부한 것을 다듬어 풀어 낸 역작이다. <독립정신>의 요지는 수백 년 전제정치에 찌들어 자기가 노예라는 사실조차 망각한 조선의 백성들을 기독교 정신으로 개화시키고 서양의 정치제도와 법률을 받아들여 내정 개혁을 단행하면서 만국공법을 준행, 중립 외교를 펼쳐 조선의 독립을 보장받자는 것이다.


개화, 개혁, 독립이 핵심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난데없이 자유주의 입문서라니.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가 있다. <독립정신>의 주장과 설명들을 읽어 나가다보면 자유주의를 쉽게 설명한 대목들이 숱하게 등장한다. 바로 가면 재미없다. 일단 20대 중반까지  우남 약전(略傳)을 통해 <독립정신>이 나오기 전까지의 사정을 보자. 


우남은 알려진 대로 이제(李禔), 그러니까 양녕대군의 16대 손이다. 적통은 아니고 출발부터 방계라서(우남의 직계 선조 양녕의 다섯째 아들은 서자) 크게 자랑할 집안은 아니다. 집안은 내리 쇠락을 거듭하고 있었다. 우남의 4대조인 이최곤이 진사가 된 이후로는 벼슬에 오른 사람도 없다(3대 째 벼슬이 없으면 양반들 사이에서 왕따 내지 찬밥 신세).


우남은 늦둥이였다. 아버지 이경선이 서른일곱, 어머니 김씨가 마흔 셋에 낳았다. 태몽에 용이 나왔다 하여 아명은 승룡. 당시 우남의 가정 경제는 사방으로 금이 간 상태로 어머니 김씨의 삯바느질과 친척들의 도움으로 하루하루를 넘기고 있었다. 아동기의 우남은 돋보이게 명석했고 시험을 치면 서당에서 따라올 아이가 없었다. 쓰러져가는 집안이 살아날 길은 우남이 벼슬길에 오르는 것 밖에 없었다. 우남은 열세 살부터 과거를 친다.


원래는 열 넷부터가 응시 가능 연령인데 급하긴 진짜 급했나보다. 떨어진다. 또 친다. 또 떨어진다. 그 사이에 혼례를 치러 우남에게는 부양가족까지 생겼다. 원래 나라가 망조가 들면 벼슬길부터 혼탁해지기 마련이다. 매관에 매직에 금품을 동반한 부정과 부패가 사슬처럼 얽힌다. 그런 상황에서 우남이 과거에 합격할 확률은 절반 한참 아래였다. 우남이 스물이 되었을 때 그나마 희망이었던 과거 제도마저 없어진다. 우남은 방향을 돌린다. 과거 대신 영어를 통해 관직 진출을 시도한 것이다. 배재학당에 입학한 것은 그 까닭이지만 그것 말고도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당시 배재학당에는 자조부(自助部)라는 것이 있어 고학생들이 생활비를 벌면서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었다. 


우남의 언어 감각은 탁월했다.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영어를 빨아들인 우남은 입학 6개월이 지난 후에는 학생이면서 신입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영어 조교가 되어있었다. 교습비로 20달러를 받아왔는데 가족들은 밤새 돈을 세고 또 셌다. 배재학당에는 박사학위를 가진 선교사들이 많았다. 에비슨, 게일, 허버트 같이 초기 기독교 선교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들이 그들이다.


우남이 이들에게 배운 서양 문명의 핵심은 정치적 자유라는 개념이었다. 영어 배우러 들어갔다가 정치를 배운 셈이다. 모든 인간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국민에게 정부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설명에 우남은 넋을 잃는다. 군주제 하에서 불온사상도 이런 불온사상이 또 없었다. 인습과 결별한다는 결의로 우남은 상투를 잘랐다. 막상 잘라놓고는 집에 바로 들어가지 못했는데 당시 그게 얼마나 파격적인 행동이었는지 알 수 있다. 배재학당에서 우남은 서재필도 만난다.


조선왕실의 공인역적이었으니 당연히 신사상(新思想)의 전파자였다. 우남은 현실 정치에 눈을 뜬다. 주시경은 한글 공부하러 이승만은 정치하러 배재 다닌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우남은 배재학당 졸업식에서 ‘한국의 독립’이라는 제목으로 영어 연설을 한다. 당시 배재학당 졸업식은 정부 대신들과 외교사절까지 참석하는 준 국가 행사였다. 참석한 사람들에게 우남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좋게 말해 청년 운동가 정확히 말해 열혈 혁명 운동권 이승만  


졸업 후 우남은 독립협회를 기반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한다. 그는 리더였고 선동가였으며 혁명가였다. 러시아의 야욕과 조선 정부의 무능을 질타하는 제 1차 만민공동회의는 종로에서 벌어진 대중 집회였다. 우남은 이 집회에서 대중연설가로 급부상한다. 고종은 독립협회가 너무 싫었다. 왕이 누군가가 미울 때 가장 자주 쓰는 게 역모 죄 씌우기다.


이상재, 남궁억 등 독립협회의 주요 인물 17 명이 반역죄로 체포되었다. 아슬아슬하게 검거를 피한 우남은 바로 반격에 나선다. 수천 명의 군중을 이끌고 경무청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인 것이다. 사람들은 열광하고 분노하고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쳤다. 우남의 대중연설이 또 한번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고종은 구국의 강철대오 황국협회 보부상들을 동원하여 시위대를 해산시키지만 그런다고 물러 설 우남이 아니었다. 잠시 몸을 피한 우남은 다시 시위를 조직해서 밤새도록 사람들을 독려한다. 때마침 용산에서 독립협회 회원인 김덕구가 피살된다. 불길에 기름을 부은 듯 시위는 격렬해지고 고종은 한 발 물러선다. 황제의 자문기관인 중추원 의원 50명 중 절반의 자리를 독립협회에 내 준 것이다. 윤치호는 중추원 부의장이 되었고 우남도 의관 자리 하나를 배정받는다.


 과거도 아니고 영어도 아니고 왕을 압박하여 벼슬을 얻었으니 참 아이러니다. 중추원 회의는 거의 전쟁 수준이었다. 우남을 비롯한 과격파들은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박영효 등의 등용을 요구했다. 고종은 벼랑 끝까지 몰려있었다. 고종의 입장에서 박영효는 역적 중의 역적이다. 역적을 등용한다는 것은 그가 더 이상 왕으로서 권위를 세울 수 없다는 얘기다.


고종은 중추원을 해산하는 초강경수를 쓰고 독립협회 의관들을 체포한다. 체포된 우남을 면회 온 주시경이 육혈포 두 자루를 몰래 건네준다. 우남은 이 총을 들고 두 명의 정치범과 탈출한다. 한 사람은 압록강을 넘었지만 한 사람은 체포된다. 군수 출신 서상대와 우남의 매일신문 공동 발행자인 최정식이다. 우남은 다시 시위를 조직하려 했지만 결국 종로에서 체포된다.


탈출했다 잡혔으니 가혹한 고문의 날들이 이어진다. 목에 칼을 쓰고 남은 것은 죽는 일 밖에 없는 상황에서 우남은 기독교 신앙 안에서 평안을 찾는다. 재판 끝에 우남은 종신형과 곤장 100대를 선고받는다. 곤장이 100대면 엉덩이 살이 다 나가고 뼈가 드러난다. 5년 7개월간 이른바 우남의 감옥풍운 시대는 그렇게 시작된다.


   
▲ 2016년 대한민국은 통째로 물이 새고 있다. 2016년의 대한민국 일부는 세 가지를 모른다. 역사를 모르고 고마움과 감사를 모른다. 자유민주주의를 쟁취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선물 받은 것이라 고마워할 줄 모른다./사진=연합뉴스
  


당시의 감옥은 오늘 날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인간을 인간으로 고려하지 않은 최악의 환경이다. 그러나 우남이 보낸 형무소 생활은 그다지 고단하지 않았다. 간혹 우남을 높이기 위해 책도 구해보지 못하고 종이와 연필 같은 건 당연히 없었다고 하는 분도 있는데 팩트에 대한 이런 식의 마사지는 별로 도움이 안 된다. 그보다 차라리 우남은 파격적인 대접을 받았고 여기에는 선교사들의 도움도 있었지만 진짜 이유는 간수들이 심정적으로 우남을 높게 평가하고 그에 맞춰 대우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낫다(이런 사례는 안중근 의사의 경우에도 볼 수 있듯 의외로 보편적이다).


고종의 총애를 받았던 엄비가 우남 칼럼의 팬이었던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로마 황제의 부인들이 기독교에 우호적이었던 것처럼 이 또한 은근히 보편적이다). 우남의 장모가 엄비의 치모로 입궁했다가 임오군란 때 사망해서 사이가 각별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것이기에 생략한다. 이런 호의와 도움으로 우남은 감옥 안에서 많은 도서와 잡지들을 읽을 수 있었다.


우남이 즐겨 읽은 것은 윌리엄 스윈튼의 ‘세계사 개요’, 로버트 매켄지의 ‘19세기의 역사’였다. 그 외 라이만 애보트라는 자유주의 성향의 목사가 간행하던 ‘뉴욕 아웃룩’과 ‘인디펜던트’도 열심히 읽었다. 물론 다 영어 책이다. 우남의 영어 실력과 시사에 대한 안목은 매일 매일이 향상의 연속이었다. 영어로 대화할 사람이 없어서 영문 신약 성경을 소리 내어 읽었다. 덕분에 죄수들과 간수들은 영어 신약성경을 통청(通聽)하는 고통인지 행운인지를 누려야했다.


우남은 감옥 안에 도서실과 죄수들을 교육하는 옥중 학교까지 열었다. 이때 같이 학교를 운영(!)했던 감옥 동기들로는 이상재(그 이상재가 아님), 이원긍, 신흥우, 홍재기, 김정식, 유동근, 이상재(그 이상재가 맞음)의 아들 이승인 등이 있다. 이들은 나중에 우남의 중요한 인적 기반이 된다. 감옥에서 가장 많이 남아도는 게 시간이다. 무료함에 질린 죄수들에게 우남은 틈틈이 성경을 읽어주었다. 자주 듣다보면 넘어가기 마련이다. 무려 40 여명이 기독교를 받아들인다. 선교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몇 년을 따라다니며 전도해야 겨우 한 명 넘어오는 게 당시 선교의 실적이었다. 선교사들은 우남에게서 선교사의 자질을 본다. 이는 나중에 우남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데 유익한 영향을 미친다. 


이승만은 왜 비분강개 끝에 눈물을 쏟았나 


이제 본격적으로 <독립정신> 이야기다. 우남은 러일 전쟁 발발을 계기로 옥중에서 집필한 ‘청일 전기’와 각종 논설 등을 다듬고 발전시켜 <독립정신>을 쓰기 시작한다. <독립정신>은 전체 52편의 논설로 이루어져 있는데 깨어나라 백성아, 선진국은 왜 잘 살게 되었는가, 신지식을 알려 주마, 요즘의 세계정세 읽는 법 등이 그 주요 내용이다. 감옥 생활의 끔찍함을 지어내어 강조하는 것이 효과적이지 않은 것처럼 <독립정신>이 독보적인 저작이라고 말하는 것  역시 도움이 안 된다.


아시는 대로 <독립정신>의 내용들은 개화파의 사상과 독립협회운동을 통해 형성된 근대 지식인들의 의식을 모아 놓은 책이고 구조는 유길준의 ‘서유견문’과 유사하다는 평가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남이 이 <독립정신>을 쉬운 말로 썼다는 것이다. 정치 팸플릿을 쉬운 언어로 쓴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써 본 사람은 다 안다.


이 책은 쉽게 읽힐 뿐 아니라 읽은 재미가 있다. 논설 말미마다 ~해보세~~ 깨어나세~ 정신 차리세~ 같은 추임새가 있는데 창가처럼 운 맞춰 부르고 싶어진다. 실제로 우남의 연설을 들은 기억이 있는 어르신들은 우남의 연설이 구수한 게 듣는 재미가 있었다고 증언한다. <독립정신>은 바로 그런 방식으로 쓰인 책이었다. 분석과 인용을 위한 텍스트로는 김충남, 김효선이 풀어 쓴 ‘조선 민족이여 깨어나라 독립정신’을 골랐다.   


먼저 서문이다.  


“감옥에서 보낸 지루한 세월이 어느덧 7년째가 되었다. (중략) 몇 년 동안 논설을 써서 신문에 게재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사정이 생겨 중단하고 있던 중 마침 러일 전쟁이 벌어지고 있어 남아男兒로서 세상에 태어나서 유익한 일을 할 만한 경륜經綸은 없지만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분노가 치밀어 눈물을 금치 못하여 그동안 해오던 한영사전 작업을 중단하고 2월 19일부터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하략)”


러일전쟁의 발발은 1904년 2월 8일이다. 항상 그렇듯 선전포고 없이 일단 전쟁부터 시작하는 일본의 전형적인 스타일에 따라 일본군은 여순을 기습 공격한다. 다음 날인 9일 일본은 인천 앞바다에 있던 두 척의 러시아군함을 격침시켰고 5월 5일 도고東鄕平八郞 함대가 요동반도에 상륙했으며 이미 4월 말 한국을 거쳐 북진한 제1부대는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진입한 것이 러일전쟁의 초반이다. 전쟁사 탐구가 목적이 아니니까 요기까지만 하자.


그런데 왜 우남은 분노가 치밀고 눈물을 금치 못했을까. 아시다시피 러일전쟁은 한반도를 집어삼키려는 전쟁이었다. 직전의 청일 전쟁이 준결승전이었다면 러일전쟁은 결승전에 해당하는데 우남은 바로 이런 사실을 목도하며 울분을 참지 못했던 것이다. 이유는 둘이다. 하나는 목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 즉 조선이 자신의 운명에 대해 전쟁의 결과를 따르는 것 말고는 아무런 할 일이 없다는 답답함이요 둘은 그런 상황에서 정작 자신은 감옥에 갇혀 있다는 처절함이다.


장원재 박사의 분석에 따르면 우남을 관통한 키워드 중 하나가 - 어쩌면 가장 중요할지도 모르는 - 외로움이다. 눈 뜨고 있다고 다 깨어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눈은 뜨고 있는데 뭘 봐야 할지 뭘 보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 더 암담하다. 그러니까 자기는 훤히 보이는데 남들은 보지 못하는 답답함 그리고 그걸 알아들을 때까지 설명해야 하는 난처함 등이 그 외로움의 구체적인 내용들이었을 것이다. 대통령이 되었을 때 고향 친구들이 찾아와서 군수 자리나 하나 얻었으면 하는 소리를 해 댔을 때도 아마 비슷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서문의 끝은 ‘한성감옥에서 죄수 리승만 씀’으로 마치고 있다. 왜 굳이 자신을 죄수라고 표현했을까. 소견을 말씀드리자면 죄를 지어 수감되어 있어 죄수가 아니라 그런 풍전등화의 상황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죄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붙인 것 같다. 하긴 알고도 방치하는 게 더 나쁘다. 물론 우남의 입장에서야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이제 챕터 별로 살펴보자. 김충남·김효선 본(이하 김2본) 9장인  ‘자주와 독립의 중요성’ 중 일부다.  


   
▲ ‘독립정신’은 우남 이승만이 사형수 수감생활 6년차에 그동안 감옥에서 생각하고 고민하고 공부한 것을 다듬어 풀어 낸 역작이다. 개화, 개혁, 독립이 핵심이다.
    

자주, 독립 그리고 자연스러운 자유주의 설명 


“자주란 한 사람 또는 한 나라가 자기들의 문제를 스스로 처리하는 것을 말하며 독립이란 홀로 서서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 것을 말하니 자주와 독립은 인간의 타고난 권리라 할 수 있다. (중략) 다른 사람이 먹여주고 입혀주고 또한 대신하여 듣고 보고 다니고 생각해준다면, 그 사람은 누가 돌봐주지 않으면 하루도 살 수 없다. 이러한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곧 사람의 몸에 있는 사마귀나 혹과 같아서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못하며 다름 사람에게 짐만 되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이다. (중략) 개명한 나라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목숨까지 아끼지 않는다. 어린아이까지 자신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하도록 가르쳐 남에게 의지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심지어는 부모에게 의존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중략) 이렇게 사람을 가르치니 모두가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며 사람이 잘 살고 못사는 것은 각자에게 달렸다고 믿는다. (중략) 외국 정치인들이 우리나라 국민성을 연구하고 하는 말이 이 나라는 독립심이 없다고 하니 뼈가 없는데 핏줄이 어떻게 생기겠는가. 우리가 이 말을 옳은 말이라 하여 스스로 뼈 없는 체 하는 것이 옳겠는가. 결코 그렇지 않으며 천만번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랫동안 압제에 눌려 살다보니 버릇이 되어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략)”


좀 길지만 인용한 이유는 자주와 독립에 대한 설명과 함께 둘의 개념을 확장해서 자유주의에 대한 자연스러운 이해를 돕고 있기 때문이다. 내 몸은 나의 것이고 남에 대한 의존은 부끄러운 일이며 잘 살고 못 사는 것이 각자에게 달렸다는 설명은 깨우치라는 계몽과 함께 자유주의의 권리와 책임에 대한 명료한 서술이다. 이 설명은 김2본 챕터 16의 ‘미국 독립의 역사’로 이어진다. 


“(전략) 미국 국민이 얻은 값진 권리는 남들이 도와주거나 아무 노력 없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피와 재물을 희생하며 힘겹게 쟁취한 것이다. 이는 곧 힘들여 얻은 재물이 오래 유지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후략)”


2016년 대한민국은 통째로 물이 새고 있다. 2016년의 대한민국 일부는 세 가지를 모른다. 역사를 모르고 고마움과 감사를 모른다. 자유민주주의를 쟁취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선물 받은 것이라 고마워할 줄 모른다. 적화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낸 주요한 동인이 유엔 16개국의 대가없는 참전이며 그 전쟁에서 3만 5천 명의 미군이 피를 흘렸다는 사실을 고마워할 줄 모른다.


유엔군 전사자들이 부산에 있는 유엔 묘지에 잠들어 있다고 말해주면 그런 게 있었어요? 묻는 사람까지 있다. 모르는 정도에서 끝나는 게 아니다. 교육감이라는 사람은 인천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을 아직도 허물지 못하고 있다고 탄식한다. 정말이지 할 수만 있다면 그 모든 것을 빼앗아 원상태로 돌려놓고 싶다. 이 문장의 울림이 큰 이유다. 자유주의에 대한 설명은 다음 챕터인 17장 ‘미국 독립 선언문’에도 등장한다. 


“(전략) 한 사람의 안녕복지는 그 자신에게 달렸으니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바라지도 말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원망할 것도 없다고 믿었다. (후략)”


우남의 이 친절한 설명을 나중에 영국의 한 여성 정치가가 한 마디로 정리한다.


“사회 같은 건 없습니다.”


통상과 교류에 대한 설명도 쉽고 간단하다. 김2본의 챕터 2인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반드시 화를 당하게 된다.’와 챕터 6인 ‘통상과 교류는 이로운 것이다’에 나오는 문장들이다. 


“(전략) 상업과 무역을 권장하여 다른 나라로부터 재물과 금은보화를 벌어들이고 공업과 농업을 진흥시켜 생활이 풍요로워지면서 사람의 가치도 매우 소중히 여긴다. 기계는 편리하고 빨라서 사람의 수고를 덜어주며 모든 사람이 골고루 교육을 받게 되고 도덕과 신의를 소중히 여긴다. 누가 신사숙녀인지 자연히 드러나며 순리가 통하고 법률이 공평하게 적용되어 나쁜 사람은 머리를 들지 못하고 약한 사람이라도 두려울 것이 없다. (하략)”


“(전략) 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해를 끼치거나 무엇을 빼앗으러 오는 것이 아니다. 통상하고 교류하여 서로 이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니 그들을 막을 수도 없고 막을 이유도 없다. (하략)”  


경제적 풍요가 인간에 대한 존중을 만들어내고 상업과 무역이 나라간 살림을 증진시키며 공업화, 기계화는 사람의 일감을 덜어주고 그 결과 교육이 확대된다는 것에 대한 간략한 설명들이다. 자유주의의 근간 중의 하나인 법치도 나온다. 순리가 통하고 약한 사람이라도 두려울 것이 없다는 아주 간단한 설명이다. 조선에도 법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양반의 법이었다. 양반의 법은 한쪽 저울추가 아예 없었다. 양반이라는 이유로 나쁜 놈들이 태연히 머리를 들고 다녔으며 신분이 낮고 약한 사람은 잘못을 하지 않고도 늘 두려워했다. 챕터 13인 ‘미국 국민들이 누리는 권리’에서는 생각해보면 그것이 얼마나 이상하고 잘못된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전략) 자기 집과 토지와 재산이 자기 것이라 믿지 못하며 자기의 처와 자식이 자기 것이 아니며 자신의 생명이 자기 것이라고 믿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희생이 되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 (후략)”


다시 강조하지만 <독립정신>의 일부는 과학책이고 뒷부분은 역사서지만 앞 장의 대부분은 정치 팸플릿이다. 확장하자면 80년대 유행했던 ‘민중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자’도 이 계열에서 뻗어 나온 것이다. 물론 결말은 전혀 다르다. 한쪽은 자유민주주의 다른 한쪽은 인민민주주의. 한 쪽은 가능한 많은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공리적 세계, 한쪽은 다수에게 최대의 고통을 안겨주는 전체주의 세계.


백성이 깨어야 비로소 관리(공무원)가 국민의 종복從僕이 된다


챕터 3인 ‘국민이 힘쓰면 문명부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에서 우남은 관리에 대한 의견을 펼치고 있다. 전제국가인 조선에 사는 만큼 조선 민중들은 민주사회를 상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해서 우남은 국가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아주 초보적인 설명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전략) 먼저 나라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나라라 하는 것은 여러 사람이 모여 사는 조직된 사회로 여러 사람이 모여 의논하는 회의체에 비유할 수 있다. 그들은 큰 건물에 모여 몇 사람씩 짝을 지어 자유롭게 웃으며 이야기하고 토론도 한다. 토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난장판이 되어 싸우다가 사람까지 죽이는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이 같은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공정한 법과 규정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적절한 사람을 선발하여 그로 하여금 법과 질서를 유지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이 같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예산도 있어야 하고 사무원들이 업무에 전념할 수 있도록 보수도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조직의 회원들이 얼마씩 거두어 필요한 예산을 마련하여 사무원들이 관리하도록 한다. (중략) 나라의 관리들은 단체의 사무원에 그리고 백성은 회원에 비유될 수 있다. 백성의 뒷받침 없이 관리들의 권력이 어디서 나올 수 있으며 백성이 관리들을 잘 감독한다면 그들이 어떻게 권한을 남용할 수 있겠는가. 근본적으로 백성이 백성 된 책임을 다하지 못했으므로 그 같은 결과가 온 것이다. 백성이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은 나라가 자기들의 나라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략)”


2016년의 시각으로 이 문장을 읽으면 안 된다. 이 문장은 1904년에는 경천동지할 무시무시한 선언이자 거의 혁명 구호다. 우남은 나라를 만드는 게 군주가 아니라 백성이라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나라의 주인인 백성들이 관리들을 선발해 보수를 주면서 일을 시키는 것이 행정이라는 사실을 덧붙인다.


당시 조선의 민중들이 알고 있는 관리는 뽑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었다. 관리는 부임하여 못살게 굴고 재물을 빼앗아 갔다. 재산권이라는 건 상상도 못했다. 잡아다 치도곤을 안긴 뒤 네 죄를 네가 알렸다, 하면 그만이었다. 없는 죄를 만들어 불고 재물을 빼앗기고 나오는 게 당시였다. 그렇게 소를 빼앗기고 재물을 털리고 미색의 아내를 내주었다. 그런데 그 저승사자처럼 두려운 그들이 실은 백성들이 고용한 존재이며 감독까지 할 수 있다니 그 얼마나 경이적이고 위험천만한 선언인가. 쉽게 말해 혁명하자는 얘기였다. 그게 독립정신이라는 얘기였다. 그런 세상이 금세 온다는 통보였다.


물론 발언에 대한 위험을 살짝살짝 피해가는 재치도 곁들였다. 우남이 제시한 나라와 백성의 나아갈 길은 미국을 모델로 한 문명개화였지만 이 찬양이 미국식 공화제로 이어질 경우 바로 역적이 되기 때문에 조선에는 영국식 입헌 군주제가 적당하다고 에둘러 말했다. 전제 정치, 입헌 군주제, 민주정치를 설명하면서(챕터 14의 ‘세 가지 정치 제도의 구별’) “민주정치가 가장 좋은 것이지만 그러나 동양에서는 그 같은 정치가 합당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매우 위험한 사상이다.”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쓰면서도 우남은 속으로 많이 웃었을 것이다. 우남은 민주정치를 논하면서 이러한 정부 형태를 ‘국민의,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해 수립된 정부’라고 설명했다. 당연히 링컨의 1863년도 연설문을 읽었으리라. 그리고 자신도 그런 나라를 만드는 일에 매진할 것임을 다짐했을 것이다. 


   
▲ 이승만이 쓴 ‘독립정신’의 요지는 수백 년 전제정치에 찌들어 자기가 노예라는 사실조차 망각한 조선의 백성들을 기독교 정신으로 개화시키고 서양의 정치제도와 법률을 받아들여 내정 개혁을 단행하면서 만국공법을 준행, 중립 외교를 펼쳐 조선의 독립을 보장받자는 것이다./사진=연합뉴스


국민의 마음이 먼저 자유로워야 한다


챕터 23인 ‘국민의 마음이 먼저 자유로워야 한다’는 <독립정신>의 엑기스를 모아놓은 것이다. 깨어야 한다, 배워야 한다가 아니라 ‘자유로워야 한다’고 말한 것이 흥미롭다. 


“헌법을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도 않고 헌법에 의한 정치가 시급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수준을 고려할 때 결코 쉽지 않다. 서양의 여러 나라들은 설립된 지 오래지 않아 나쁜 습관이 깊이 뿌리 내리지 않았지만 동양 사람들은 수천 년에 걸쳐 나쁜 습관이 깊이 뿌리박혀 학문이나 교육의 힘으로 그 같은 폐습을 쉽게 뿌리 뽑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유라는 새로운 이념으로 사람들을 오랜 관습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여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할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하략)”


드디어 자유가 나왔다. 뭘 배우고 뭘 깨우칠 것인가에 대한 우남의 실질적인 답변인 셈이다. 그대들의 마음속에 자유가 뛰놀게 하라, 자유라는 개념으로 세상을 바라보라는 우남의 발언은 여러 부문에서 다채롭게 펼쳐진다. 먼저 양반과 상민의 개념을 허물라 주장한다. 전국을 통틀어 양반은 전 국민의 천분의 일도 안 된다며 나머지 9백9십9는 양반들을 위해 존재하는 꼴이니 나라에서는 9백9십9구의 백성을 잃어버린 것이며 이처럼 우수한 백성을 잃어버린 나라가 쇠퇴한 것은 당연하다고 말한다.


이는 효율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교육과 학문을 다루는 부분에서 여러 사람이 지혜를 모은다면 실수가 적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같은 맥락이다. 이렇게 여덟 가지의, 자유가 필요한 영역과 백성의 자세를 설명하면서 우남은 이런 것들이 사람의 마음을 결박하여 자주권을 귀하게 여길 줄 모르는 풍토가 만들어졌다며 이를 자유로 깨고 신학문으로 돌파하자고 주장한다. 챕터 23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전략) 그러므로 우리 동포들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신학문을 배우는 것이다. 그러나 신학문에 힘입어 자유의 권리만 알고 자유의 한계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권리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권리의 한계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당연히 다음 챕터인 24의 제목은 ‘자유에도 한계가 있다’이다. 우남이 책임을 중시하는 것은 ‘사람이 만물 중에 지능이 가장 발달돼 있기 때문’이다. 


“(전략) 모든 사람은 책임에 따라 권리가 있고 또한 권리를 행사하는 데 책임이 따른다. (후략)”


우남의 책임론은 법치로 이어진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의 법치에서 나라와 나라 사이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공법(국제 법)까지 주장을 확장시킨다. 어떤 학자들은 우남이 미국 선교사와의 개인적인 신뢰 형성을 미국에 대한 신뢰로 확대해석했으며 만국공법에 대한 환상에 빠져 그 배후에 숨어있는 제국주의적 의도를 간과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일부 사실이다.


1905년 8월 우남은 루즈벨트를 만나 하와이 교민의 청원서를 전달하면서 한미수호조약에 따라 조선의 독립을 지켜달라고 부탁한다. 루즈벨트는 외교 경로를 통해 정식으로 청원서를 전달해 달라며 우남을 돌려보냈지만 이미 7월에 동경에서 가쓰라 - 태프트 밀약을 체결한 상태였다. 물론 그것은 <독립정신>을 쓴 한참 뒤의 일이고 그 일로 우남은 국제 정치의 비정함과 약소국을 대하는 강대국의 냉정함을 배운다. 맞고 배운 것이 오래간다. 우남의 미국에 대한 이해는 그 일로 한층 깊어지니 그 이유로 <독립정신>을 폄하할 이유까지는 없을 것이다. 


마치며 아쉬운 것 하나


이렇게 우남은 자유와 책임 그리고 법치까지 그의 <독립정신>에서 고루 소개하고 쉽고 간단한 설명을 달았다. <독립정신>을 자유주의 보급 도서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다. 책을 다 읽고 나면 그리고 그 주장에 수긍을 한다면 독자는 이미 절반쯤은 자유주의자가 된 셈이다. 자유주의나 독립과는 살짝 떨어져 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게 읽은 부분을 언급하며 글을 마친다. 챕터 13인 ‘새로운 것과 전통의 구별’이다. 


“문명개화文明開化라 함은 사람의 지혜를 개발하여 없던 것을 만들어내며 있던 것을 향상시키며 좋은 것을 더 좋게 만드는 것이다. 증기선을 만들어 과거에 다니지 못했던 큰 바다를 쉽게 항해하며 철로를 부설하여 먼 거리를 빠르게 왕래하고 석유를 뽑아내어 등불을 밝히다가 그보다 작지만 쓰기에 편리한 전등電燈과 전지등電池燈을 만들어 쓰고 전보선을 가설하여 먼 곳까지 문자를 주고받으며 전화를 만들어 언어로 주고받고 있다. 나아가 무선전선을 발명하여 전선도 없이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되어 머지않아 전선이 완전히 없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하략).”     


머지않아 전선이 완전히 없어지게 될지도 모른다고? 쥘 베른도 아니고 어떻게 이런 깜찍한 발상을 하셨을까. 또 하나 흥미를 끄는 대목이 있다. 개화된 사람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과 교류하려 하지만 미개한 사람들은 남의 것은 보기도 듣기도 싫어한다며 한 말이다.   


“(전략) 비유를 들자면 밭에 좋은 씨를 뿌리면 처음에는 잘되다가 해마다 그 씨를 받아 그 땅에 다시 심으면 점차 씨의 좋은 성질은 줄어들어 마침내는 잡초같이 되고 새로운 씨가 번성하여 온 밭을 다 차지하게 된다. 인종이 섞여 사는 것도 이 같은 이치이다. (후략)”


이 대목을 문화에 접목해 말하자면 재미있는 해석이 가능하다. 문화에는 순종지향적인 것이 있고 별종이 있고 잡종이 있다. 이 중 자기 문화만 고집하면 순종지향이 된다. 여기서 가끔 별종이 나오기도 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에는 어렵다. 순종이 다른 종을 만나면 잡종이 나온다. 잡종이 되면 문화적인 힘은 순식간에 극대화된다.


세계를 끌고 가는 나라들의 공통점은 전부 이 잡종 문화국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대표적인 나라는 미국이다. 미국 문화의 탄력성은 계속해서 이질적인 문화를 받아들인 결과다. 우남이 말한 계속해서 심은 좋은 씨는 순종을 의미한다. 좋은 씨만 고집하는 사이 그 씨의 좋은 점이 다 빠져나가고 결국 쇠락하게 된다.


인종이 섞여 사는 것도 이와 같은 이치라는 우남의 충고는 그래서 귀 기울일 만 하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것이 있다면 <독립정신>에 대한 소개가 의고체를 풀어 쓴 정역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완전히 현대어로 된 ‘평역 독립정신’이나 ‘평설 독립정신’을 기대하는 건 너무 위험한 발상일까. 우리는 어쩌면 우남의 사상을 1904년에 그대로 잡아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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