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대한민국이 번영하고 북한이 쇠퇴한 이유

자유경제원 / 2016-03-13 / 조회: 6,009       미디어펜

 1876년 개항한 뒤, 조선의 위정자들과 지식인들은 갑자기 밀어닥친 유럽 문명에 나름으로 적응하려 애썼다. 그런 노력은 계몽운동의 모습을 띠었고 나름으로 성과를 얻었다. 그러나 당시의 지배적 조류였던 제국주의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데는 힘이 부쳤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뒤, 많은 지사들이 독립 운동에 나섰다. 그들의 고귀한 자기 희생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배한 상황 속에서 꽃을 피워 조선은 일본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1948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섰다.


한 민족이 두 나라로 나뉜 것은 비극이었지만, 독립된 나라들이 선 것은 일단 큰 성취였다. 그리고 그 두 나라의 성립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들은 이승만과 김일성이었다. 그래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두 사람이 역사에서 으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업적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가장 근본적 차이는 물론 자유로운 나라 대한민국과 더할 나위 없이 압제적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차이에서 나온다. 그러나 개인적 역할에서도 본질적 차이가 있다는 점을 놓쳐선 안 된다.


소련은 처음부터 북한에 위성 국가를 세우려 했고 그 일을 효율적으로 실행했다. 김일성은 그런 과정에서 소련이 쓴 작은 인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소련군 대위여서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의 위계에서 아주 낮은 자리를 차지했다. 조선에 알려지지 않았고 지지 세력이 없었고 심지어 조선의 공산주의자들과도 아무런 연결이 없었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의 지도자들로는 여운형, 박헌영, 현준혁과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김일성이 없었다하더라도, 북한의 역사는 소련의 계획대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이승만의 경우는 대조적이다. 그는 독립운동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했다. 그와 비견되는 독립운동가들로는 초기의 도산 안창호와 후기의 백범 김구가 있을 따름이다. 도산과 백범은 인품과 능력에서 정말로 뛰어난 지도자들이었지만, 우남이 식견에서 더욱 뛰어났고 업적에서 더욱 두드러졌던 것도 분명하다. 일본이 궁극적으로 미국과 맞서게 되고 일본이 패퇴한 상황이 나온다는 선견지명에 바탕을 두고, 미국 시민들과 지도자들이 조선의 존재를 잊지 않도록 40년 동안 애쓴 우남의 노력에 대한민국의 성립과 존속은 헤아리기 어려운 빚을 졌다. 민족과 같은 거대한 존재도 잊히면 되살아날 수 없다.


   
▲ 미국과 소련의 군정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대한민국의 수립을 역설한 우남의 식견과 용기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국제 정세에 누구보다도 밝았던 우남은 소련이 점령한 북한과 미국이 점령한 남한은 다시 합쳐질 수 없다는 현실을 투철히 인식했다.


미국 군정기의 우남의 역할도 대한민국의 성립에 결정적 요소였다. 미국은 남한에 자유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원칙만 세웠다. 그런 나라의 성격과 그것을 세우는 방안에선 국방부와 국무부가 생각이 크게 달랐다. 게다가 당시 미국 국무부는 소련의 첩자들과 동조자들이 많은 부서였고 조선 문제를 다루었던 앨저 히스와 존 빈센트는 소련의 첩자들이었다.


그래서 소련과의 교섭에서 미국은 소련에 밀렸고 남한에 정부를 세우는 일에서도 효과적이지 못했다. 특히 남한 주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은 우남과 백범을 인위적으로 제외하고 여운형과 김규식을 위주로 한 좌우합작을 추진했다. 그런 상황은 궁극적으로 공산주의 세력의 집권을 부른다는 것이 공산주의자들과 오래 싸워온 우남과 백범의 일치된 견해였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나오지 않도록 한 데에, 특히 미군정 당국과의 대결도 마다하지 않은 결단과 궁극적 승리에, 이승만의 위대성이 있다. 


사정이 그러하므로, 건국과 관련된 우남의 업적을 살피려면, 우리는 그가 미군정 아래의 남한이라는 환경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을 늘 인식해야 한다. 비록 3년이 채 못 되는 기간이었지만, 미군의 통치기에 대한민국의 바탕이 마련되었다. 한 사람의 운명이 태아일 때 근본적으로 결정되듯, 대한민국의 운명은 이 시기에 결정되었다.


“무엇이 남한과 북한의 서로 극명하게 다른 운명을 결정했는가?”라는 물음을 던지면, 이 점이 이내 이해된다. 아주 동질적인 사회가 문득 남북한으로 나뉜 뒤, 두 나라는 점점 서로 달라졌고 마침내 지금처럼 더할 나위 없이 이질적으로 되었다. 남한엔 자유민주주의를 따르는 미국 군대가 진주했고 북한엔 전체주의를 따르는 소련 군대가 진주했다. 바로 그 차이가 남북한에서 세워질 나라의 운명을 결정했다.


아쉽게도, 우리 사회에서 미군정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소홀하다. 근본적 까닭은 물론 우리 사회에 가득한 민족주의다. 늘 강대국들로부터 핍박 받아온 터라, 우리 사회에선 민족주의가 가장 두드러진 정서고 시민들은 ‘역사적 낭만주의’에 심취한다.


좌파가 이념적 이유에서 미군정을 폄하해왔다는 사정도 있다. 미군정을 폄하함으로써 자신들의 반미주의의 논리적 근거로 삼으려는 그들의 시도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렇다고 우파가 미군정에 호의적이었던 것도 아니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영광스럽게 하는 데는 우리 스스로 세우고 가꾸어온 나라라고 얘기하는 편이 미국의 보호와 격려 덕분에 싹이 트고 자라날 수 있었던 나라라고 얘기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심리가 자연스럽게 작용했다.


이런 사정 때문에, 3년 동안의 군정을 통해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공식적 수립 이전에 실질적으로 세워져서 움직이고 있었다는 사실이 제대로 인식되지 못했다. 남한과 북한에서 미국과 소련은 자신들의 이념과 체제를 철저히 따르는 나라를 세우는 데 성공했다. 그 사실 덕분에 남한은 점점 번성했고 북한은 점점 쇠퇴했다.


   
▲ 한반도의 분할 점령은 남한 사회의 일체성을 심중하게 훼손했다. 특히, 북한 김일성(소련)이 남북한의 경제 교류를 막고 전력 공급을 끊은 뒤, 남한 경제는 제대로 작동할 수 없었다. 당시엔 이미 냉전이 시작되고 미국과 소련 사이의 관계가 드러내놓고 적대적이 되었다.


미군정의 업적을 평가할 때, 당사자들이 맞은 어려운 처지를 고려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긴요하다. 주어진 조건들을 살피는 일이야 모든 평가들에서 긴요하지만, 낯선 땅에서 낯선 임무를 갑자기 맡아서 수행해야 했던 터라, 미군정 당국자들의 경우엔 특히 그렇다.


먼저, 태평양 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국은 일본을 군사적으로 굴복시키는 일에 마음을 쏟았고 승전 이후의 일들엔 미쳐 준비하지 못했다. 일본의 항복이 급작스러웠으므로, 이런 상황은 엄청난 정치적 및 행정적 문제들을 낳았다.


다음엔, 남한 점령 임무를 수행한 당사자들이 군인들이었으므로, 한반도를 점령해서 통치하는 데 필요한 지식도 경험도 전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미국의 남한 점령은 임기응변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셋째, 미국은 한반도에 대한 전반적 계획이나 목표가 없었다. 한반도에 관해서 연합군이 내놓은 것은 연합국 정상 회담들에서 나온 성명서들의 선언적 조항뿐이었다. 따라서 미군정의 목표와 전략은 항해하면서 항로와 목적항을 찾는 형국이었고, 많은 시행착오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자주 독립을 보장하는 선언에서, 신탁통치를 시행하는 방안을 거쳐, 국제연합(UN)의 주관 아래 통일된 독립 국가를 세우는 방안으로 계속 정책이 바뀐 데서 이런 사정이 드러난다.


넷째, 한반도의 분할 점령은 남한 사회의 일체성을 심중하게 훼손했다. 특히, 북한이 남북한의 경제 교류를 막고 전력 공급을 끊은 뒤, 남한 경제는 제대로 작동할 수 없었다. 당시엔 이미 냉전이 시작되고 미국과 소련 사이의 관계가 드러내놓고 적대적이 되었다. 자연히, 분단에 따른 문제들은 풀릴 수 없었고, 사태는 점점 악화되었다.


다섯째, 당시 한반도엔 원숙한 시민 사회가 존재하지 않았다. 조선 왕조가 멸망했을 때, 조선은 중세적 국가였다. 일본의 식민지가 된 뒤로, 조선 사회는 빠르게 근대 사회로 변모했지만, 식민지라는 근본적 조건 때문에, 정상적 시민 사회가 나올 수 없었다. 조선 사회가 일본의 통치에서 해방되었을 때, 조선 사람들은 단 한 번도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제나 발전된 시장 경제를 경험하지 못했었다. 특히, 1930년대 말엽부터 조선은 전시 체제로 바뀌어, 모든 정치 활동은 억압되었고 경제는 철저히 통제되었다. 게다가 망명 정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강대한 일본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들을 전전해서 한반도에 전혀 근거를 갖지 못했으므로, 해방된 사회에서 제약된 지도력만을 발휘했다. 그런 사회에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제와 시장 경제 체제를 단숨에 도입하는 일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 우남 이승만과 김일성. 두 사람의 업적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가장 근본적 차이는 물론 자유로운 나라 대한민국과 더할 나위 없이 압제적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차이에서 나온다. 그러나 개인적 역할에서도 본질적 차이가 있다는 점을 놓쳐선 안 된다./사진=연합뉴스


이처럼 상황이 어려웠으므로, 미군정으로선 수행하기 아주 어려운 임무를 갑자기 부여받은 셈이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그 임무를 기대보다 훨씬 잘 수행했다.


먼저, 사회의 안정을 잘 유지했다. 미군이 남한에 진주했을 때, 그들은 평화롭고 안정된 사회를 발견했다. 조선 사회는 격렬했던 제2차 세계대전으로 직접적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의 갑작스러운 항복 선언은 조선 사람들의 환호를 불렀지만, 일본 사람들에 대한 보복이나 치안에 대한 위협은 거의 없었다. 급속한 남한 진주로 행정력이 크게 딸리는 미군 당국은 일본의 조선총독부 체제를 유지해서 치안과 경제의 안정을 꾀했다. 비록 한국 역사가들에 의해 비난을 받지만, 이런 조치는 현실적으로 적절했으니, 미군 당국은 낯선 땅에서 낯선 임무를 수행할 준비를 할 수 있었고, 남한 사회는 뜻밖의 일본 패망과 해방이라는 근본적인 사회적 변화에 별다른 혼란 없이 적응할 수 있었다. 특히 공산주의자들의 정권 장악 기도를 차단할 수 있었다.


다음엔, 미군정은 조선 역사와 사회를 이해하려 애썼고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원리를 따르면서도 남한 사회에 걸맞은 정치 체제를 세우려 했다. 한반도에서 먼 터라, 미국은 원래 남한에 대한 영토적 야심이 없었다. 그래서 군정 당국은 행정 기구에 각계각층의 남한 주민들을 참여시키려 시도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건국 과정에선 남한 주민들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른 선거를 통해서, 자유민주주의가 한 번도 시행된 적이 없는 사회에서 자유로운 민주주의 사회가 나오도록 유도했다.


셋째, 북한의 소련군 최고사령부의 구체적 지시와 자금 지원을 받아 대한민국의 수립을 방해한 공산주의자들의 극렬한 저항을 효과적으로 극복해서, 대한민국이 짧은 기안에 성공적으로 자리잡도록 했다. 미국 국무부의 극동국이 소련 첩자들에 의해 장악된 상황에서 대한민국이 빠르게 세워지고 안정하도록 한 것은 미군정의 큰 성취였다.


그런 관점에서 군정 시기를 살피면, 대한민국의 수립이 얼마나 큰 기적인가 드러나고 그 일을 완수하는 데 기여한 우남을 비롯한 우익 지도자들이 식견과 품성에서 얼마나 뛰어났는가 새삼 도드라진다. 반면에 대한민국의 수립에 부정적이었던 좌익 및 중도파 지도자들의 부족함은 선연하게 드러난다.


미국과 소련의 군정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대한민국의 수립을 역설한 우남의 식견과 용기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1946년 초반 미소공동위원회가 성과를 얻지 못하자, 임시로 그어진 군사적 경계선인 38선이 국경으로 굳어졌다는 것이 드러났다. 국제 정세에 누구보다도 밝았던 우남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우방이었던 미국과 소련 사이에 전 세계적인 냉전이 이미 시작되었고, 자연히, 소련이 점령한 북한과 미국이 점령한 남한은 다시 합쳐질 수 없다는 현실을 투철히 인식했다.


북한에 소련의 괴뢰 정권인 공산주의 정권이 실질적으로 들어섰고 그들의 남한에 대한 공세가 격화되는 상황에서, 그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는 것이 유일한 현실적 방안이라는 결론에 이르렀고 그런 소신을 밝혔다. 그리고 그 일에 매진했다. 소련과 미국의 군정이 지닌 중요성을 인식하면, 우남에 대한 비난의 근거였던 그런 견해는 오히려 우남에 대한 높은 평가의 근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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