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김수영은 민중문학 희생양…`우상의 가면` 벗겨야 할 때

자유경제원 / 2016-06-16 / 조회: 7,548       미디어펜
예로부터 한 시대의 문제를 꼬집고 비판하는 문학작품은 대중의 환영을 받아왔다. 그 중에서도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소시민적 슬픔이 담긴 시를 쓰던 김수영은 1960년 본격적으로 사회참여시를 쓰기 시작하여 이름을 알린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일찍 등졌지만 그의 작품은 문단의 지지를 받으며 더 큰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김수영의 사회참여시는 대중의 분노를 만들어내는 도구가 되어버렸다. 자유경제원은 이에 '김수영 가짜 신화'가 만들어진 배경, 문단권력을 둘러싼 구조적 문제를 비판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13일 리버티홀에서 열린 김수영 비판 연속세미나 종합 토론회 ‘시인 김수영 바로보기 - 누가 김수영을 이용하나’에서 발제자로 나선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는 “시의 언어가 산문처럼 도구가 되면 시로서의 존재가치가 사라지고 시가 사물의 언어를 지향하는 순간 사회참여의 기능은 날아간다”고 지적했다. 참여시라는 명칭 자체가 한국에서나 유용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남 교수는 “김수영은 ‘쉬르레알리즘 계통의 시를 쓴 60년대 시인으로 재치 있는 산문작가’였다가 정확한 평가”라며 “김수영이 시인으로 취급받는 이유는 김수영이 산문을 시처럼 썼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어 남 교수는 민중문학집단에 의해 “죽어서 말이 없고 약점이자 강점이 되는 모더니즘을 지닌 김수영이 낙착되었다”며 “이들 특수한 평론가 집단이 특수한 목적을 위해서 계획적이고도 장기적으로 그를 우상화시킨 결과 김수영은 이용당했으며 현재도 활용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남 교수는 “김수영에 대한 백낙청의 거리두기를 통해 참여/민중문학의 본질을 폭로하고 김수영의 시를 제 자리에 놓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아래 글은 남정욱 교수의 발제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참여시라는 허구, 그리고 김수영 제자리 찾아 주기


예술은 모방이다. 이 모방이 어느 방향을 향하느냐 그리고 어떤 시선을 갖느냐에 따라 시詩와 산문散文의 경계는 지어진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세계 그 자체를 하나의 존재로 모방한 문학 양식은 시詩다. 반면에 인간의 행위를 모방의 대상으로 한 것은 산문散文이다. 그래서 시에 등장하는 인간은 ‘존재하는 인간’이다. 나무와 풀, 꽃과 고양이처럼 인간은 하나의 사물로 순간적으로 포착되는 ‘존재’일 뿐이다. 산문에 등장하는 인간은 이와 반대로 능동적인 인간이다. 산문이 모방하는 인간은 ‘행위 하는 인간’으로 여기에서 사르트르의 그 유명한 ‘앙가쥬망engagement'이 나왔다. engagement는 약속, 참여, 개입, 약혼 등으로 해석되며 공통점으로는 개인이 상황에 ’구속‘된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산문은 필연적으로 현실 참여적이 될 수밖에 없다. 경로를 보자면 이렇다. 첫째, 산문가는 상황(사회)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둘째, 그래서 산문문학은 상황을 폭로해야 하며 상황을 변화시키는데 그 본질이 있다. 셋째, 따라서 산문문학의 언어는 도구로 사용되며 모든 산문문학은 메시지 전달의 언어이다. 사르트르가 현실참여에서 시를 쏙 빼버린 이유는 자명하다.


시의 언어는 도구가 아니라 사물 자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의 언어가 산문처럼 도구가 되면 시로서의 존재가치가 사라지고 시가 사물의 언어를 지향하는 순간 사회참여의 기능은 날아간다. 이 양자의 조합은 불행히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참여시라는 명칭 자체가 한국에서나 유용한, 변방의 변형문학인 것이다.


이 변방의, 비주류의 문학을 보통 경향문학,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고 부른다. 가끔은 일상생활이나 사회현상을 소재로 하는 시를 참여시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역시 사전에는 없는 말이고 존재가 불가능한 장르다. 시에서 인간은 주연이 아니다. 시에서 인간은 꽃과 달팽이와 똑같은 한 표다. 산문에서의 주연은 인간이다. 꽃이나 달이나 강아지풀이 주인공인 소설은 없다. 그들은 사고하거나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의 본질이 이럴진대 참여시 논쟁 자체가 실은 시간 낭비다. 세상에 그런 시는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김수영은 ‘쉬르레알리즘 계통의 시를 쓴 60년대 시인으로 재치 있는 산문작가’였다, 가 정확한 평가다. 그런데 왜 김수영은 시인으로 취급받는 것일까. 그것은 김수영이 산문을 시처럼 썼기 때문이다. 시라는 그릇에 담긴 산문, 김수영 시(라 불리는)의 본질은 행과 연을 구분지어 적당히 분절한 철저히 산문이다. 쉬르레알리즘 계통의 시인이 어떤 연유로 캐스팅되어 졸지에 한국 문단의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을까.  

 

   
▲ 김수영의 시는 난해하다. 모더니즘 시들이 대개 그러하듯 지독한 자의식의 발산이다. 이런 시를 쓰던 사람을 저항시인, 민중 시인으로 만들었다. 김수영을 자유와 저항의 관점에서 떠받드는 사람치고 그의 작품을 다섯 개 이상 아는 사람은 없다./사진=SBS 카드뉴스 '스브스뉴스'


‘띄운다.’ 필요에 의해 실제 이상으로 부풀리는 경우를 말한다. 띄울 대상이 외모 자본이 있거나 말言舌이 좋으면 좋은 조건이다. 최상의 조건은 죽어서 말이 없는 경우다. 한참 띄우는 데 당사자가 “그거 아닌데요” 해버리면 그보다 맥 빠지는 일이 없다. 해서 띄우는 일은 대부분 사자死者의 리스트에서 적당한 재목을 찾는 데서 시작된다. 시詩에서 시市민사회를 만들어 낸 것은 대단한 공력이다. 시민은 서민과 다르고 국민과도 다르며 인민과도 다르다.


서민은 상처받는 이름이다. 국민은 몰려가는 이름이다. 인민은 분노하는 이름이다. 시민은 좀 뉘앙스가 다르다. 시민은 교양을 갖추고 비판의식을 가진 이름이다. 둘은 교양과 비판이 균형을 맞추면서 작동해야 한다. 그러나 어느새 부터인가 이 부등호는 교양 < 비판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흐름은 공식으로 부동화된다. 누가 한 말인지 이제 기억도 안 나지만 70년대 중반 ‘지식인은 비판하는 존재다’라는 말의 연장선상에서 끌어낸 것이 그들이 만들어낸  현재의 시민이고 이들이 가진 ‘매사’의 비판 의식이 ‘건강한’ 시민의식이다. 그걸 만들기 위해서는 지표가 될 만한 모델이 있어야 했다.


4.19 이후 이 작업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후보는 둘로 압축됐다. 하나는 ‘껍데기는 가라’의 신동엽이고 하나는 김수영이다. 껍데기는 4.19라는 시대정신에는 어울렸지만 촌티가 났다. 도시가 생활이 중심이 되는 세상에서 촌티는 죄악이다. 그래서 낙착된 게 김수영이다. 결과적으로 매우 탁월한 선택이었다. 모더니즘이라는 약점이 있었지만(시가 어렵다) 그건 전근대성의 반대말이기도 했으므로 약점인 동시에 강점이었다. 어쩌면 관념적인 시인이 어떤 계기로 사회비판의식에 눈을 떴다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었다. 이제껏 무지하던 인간들에게 면죄부를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제의 무지한 나를 청산하고 오늘부터 건강한 비판인人, 이것이 그들이 찾아낸 모델이자 오늘 날 시민의 전형이 된 일의 유래다.


그러나 그 작업 이전에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었다. 권위의 해체와 청산이다. 당대 문단의 주류를 폭파하고 물줄기를 바꿀 필요가 있었다. 정지용, 김기림, 백석, 이용악, 오장환, 임화 등이 이때 동원된 이름들이다. 노태우 정부 시절 해금解禁조치로 이들은 되살아난다.


 그렇게 월북작가들은 김소월, 한용운, 이상, 서정주, 유치환, 이육사, 윤동주,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김춘수 등 자유주의 문학진영(문단에서는 순수문학으로 불린다)의 주류 시인들과 거의 같은 반열에 오른다. 이들을 불러낸 이데올로기는 물론 민족주의다. 정지용의 ‘향수’는 그 대표적인 경우가 되겠다. 농촌의 목가적인 풍경은 아취로 포장되어 민족의 정서가 된다. 정확히는 조선으로의 회귀라는 퇴행성 정서다. 가끔은 문단의 주류가 이들이 아닌가 착각하게 만드는 놀라운 공작이다. 


김수영의 시는 난해하다. 모더니즘 시들이 대개 그러하듯 지독한 자의식의 발산이다. 이런 시를 쓰던 사람을 저항시인, 민중 시인으로 만들었다. 김수영을 자유와 저항의 관점에서 떠받드는 사람치고 그의 작품을 다섯 개 이상 아는 사람은 없다. 오로지 이거 하나만 죽어라 외워댄다. 다도 아니다. 제목과 한 구절만 왼다. 시인은 그들의 손에 죽었다. 


푸른 하늘을  

어째서 자유에는/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혁명은/왜 고독한 것인가를


   
▲ 왜 김수영은 시인으로 취급받는 것일까. 그것은 김수영이 산문을 시처럼 썼기 때문이다. 시라는 그릇에 담긴 산문, 김수영 시(라 불리는)의 본질은 행과 연을 구분지어 적당히 분절한 철저히 산문이다./사진=SBS 카드뉴스 '스브스뉴스'


‘우상의 가면’이라는 김수영론으로 허상을 낱낱이 까발린 오세영 교수는 이를 “특수한 평론가 집단이 특수한 목적을 위해서 계획적이고도 장기적으로 그를 우상화시킨 결과이다. 그 우상화의 핵심은 김수영의 시가 훌륭하며 대표적인 참여시라는 것, 참여시는 다른 어떤 시보다 훌륭한 것임으로 이 양자를 결합한 김수영의 시는 더욱 훌륭하다는 것 등의 논리로 요약된다.”고 명쾌하게 정리한 바 있다. 김수영은 이용당했으며 현재도 활용되고 있다.


김수영 덕분에 시가 죽고 산문작가로서의 김수영도 죽었다. 모든 소설을 독자가 마무리하는 것처럼 시 역시 그 시의 완결은 독자의 몫이다(이것이 바로 전체주의적 문학관과 우리가 같이 갈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당위를 논하는 순간 시는 일방적인 해석으로만 존재하고 선전의 도구로 전락한다. ​하여 김수영에 대한 백낙청의 거리두기를 통해 참여/민중문학의 본질을 폭로하고 김수영의 시를 제 자리에 놓음으로 김수영이라는 이름에 해괴한 묘비를 세운 자들을 응징하고 김수영을 잘못 묻힌 무덤에서 구해주는 일, 그것이 우리의 할 일일 것이다.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남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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