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칼럼 인천상륙작전, 문화계의 불편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자유경제원 / 2016-08-11 / 조회: 8,214       미디어펜


인천상륙작전의 역사적 의미를 망각한 문화계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서론

2016년 7월 개봉한 “인천상륙작전”은 세계적인 배우 리암 니슨이 맥아더 장군으로 출연한다는 소식이 알려진 후부터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개봉이후 높은 완성도와 짜임새 있는 연출력, 인지도 높은 배우들의 열연만으로도 한국영화사의 한 획을 그었다는 평이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뒤틀린 반대여론도 만만치 않다. “반공영화의 부활”, “유명인을 내세운 졸작” 이라는 악평까지 문화계에서 쏟아지는 악평들은 영화라는 작품을 뛰어넘어 한국전쟁 자체의 의미마저 훼손시키는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한국전쟁의 세계사적인 중요성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곧바로 벌어진 냉전의 시작을 알린 전쟁이라는 의미를 넘어, 농업경제만을 기반으로 조선시대와 식민지 시대를 거쳤던 공산화가 되기 가장 쉬웠던 한반도의 한쪽인 대한민국이 민주제도와 시장경제국가로 나아갈 수 있던 발판을 마련했다는 의미만으로도 인류역사상 유래를 찾기 힘든 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 글 에서는 인천상륙작전이 지닌, 전략적 평가와 의미, 역사적 업적과 교훈을 통해 현재 논란의 중심이 되어버린 인천상륙작전의 역사적 의미를 통해 문화계에 나타난 뒤틀린 역사해석의 심리구조를 파악하여 자칫 비뚤어진 선동이 될 수도 있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빗나간 오류를 조금이라도 바로 잡고자 한다.

1. 인천상륙작전의 전략적 평가와 의미

1950년 한국전쟁발발 직 후 한국군과 유엔군이 초기의 수세에서 벗어나 반격을 시작하는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쟁초기 기습으로 인해 낙동강 까지 진격한 북한군은 유엔군의 참전과 한국군의 반격으로 더 이상 진출하지 못하고 교착상태에 빠져있었다.

맥아더 장군은 북한군이 남진을 계속할 경우 장차 인천으로의 상륙작전이 불가피 할 것으로 전망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美지상군의 참전이 결정된 나흘 뒤에 이미 일본에 주둔한 미국 육군 제1기병사단으로 7월 하순에 상륙작전을 단행할 수 있도록 훈련을 지시하였지만, 美지상군을 수원부근에 투입하였으나 북한군의 남진을 막지 못해 인천으로 상륙작전을 실시하여 북한군을 포위 격멸하려는 블루하트(Blue heart) 계획을 취소하게 되었다.

이후 계속적으로 작전계획을 연구 발전시켜 '계획 100-B(인천)’, '계획 100-C(군산)’, '계획 100-D(주문진)’의 3개안 중 낙동강에서 반격을 취한다는 '계획 100-B(인천)’가 선택되어 9월 15일을 예정으로 한 크로마이트(Chromite) 작전계획이 수립되었다. 

  
▲ 올해는 인천상륙작전 66주년이 되는 해이다. 문명이 존속하는데 가장 중요한 가치인 상무정신(尙武精神)을 천박하게 여긴 조선의 말로는 참담했지만 대한민국 건국이후 벌어진 '우리’의 역사는 인류사적으로나 세계사적으로도 유래가 없을 만큼의 획기적인 경제발전과 2016년 현재 세계 10대 군사강국의 위용을 과시하는 국가 대한민국의 역사가 만들어졌다./사진=영화 '인천상륙작전' 스틸컷


상륙예정지인 인천은 서울에서 서쪽으로 32km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서울로 접근할 수 있는 최단거리 항구이고, 수도 서울을 탈환함으로써 적에게 전술적으로나 심리적으로도 치명적인 타격을 가 할 수 있는 한편, 남한 깊숙이 투입된 북한군의 보급선을 차단할 수 있으며, 동시에 낙동강 전선에서 총반격을 실시함으로 북한군 주력을 압축 섬멸함으로써 소수의 희생으로 많은 성과를 획득 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하지만, 이 작전이 시행될 인천항은 많은 난점을 안고 있었다. 즉, 인천항에 이르는 수로는 좁은 단일수로로서 대규모 함정의 진입이 불가능하고, 적이 기뢰를 매설할 시 많은 피해가 예상되며, 조수간만의 차가 10m 내외로 심하고, 지형 등 자연적인 불리한 조건과 병력, 탄약, 보급품의 운송 등 작전을 지원하기에 많은 어려움이 따로 합동참모본부와 해군은 반대 의견을 제시하였고, 대안으로 군산이나 아산만 해안의 포승면 일대로 상륙지점의 변경을 주장하였다.1)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적은 후방을 무시하고 있고, 병참선이 과도하게 신장되어 있으므로 서울에서 신속히 이를 차단 할 수 있으며, 그들의 전투부대는 사실상 낙동강 일대의 제8군 정면에 투입되어 훈련된 예비 병력마저 없어, 전세를 회복할 능력이 거의 없다”라고 설명하였고, 전략적, 심리적, 정치적인 이유를 들어 중요한 수도 서울을 단 시일 내 탈환하기 위해서는 인천에 상륙해야 한다는 맥아더 장군의 결단으로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8월 28일 '크로마이트(Chromite) 작전계획’을 승인하였다. 이에 따라 인천상륙작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상륙지역을 고립시키기 위하여 유엔 해군과 공군은 9월 7일부터 14일까지 동해와 서해에서 양동작전을 펼쳤으며, 이 기간에 유엔 공군은 총 3,250여 회나 출격하여 전략 · 전술 표적을 강타하였다. 

이 계획에 의거 편성된 상륙부대로 美제10군단을 창설하여 군단장에는 알몬드(Edward M. Almond)소장을 임명하고, 예하에 미국 해병대 제1사단<사단장 스미스(Oliver P. Smith) 소장>과 美육군 제7사단 <사단장 데이비드 바아(David G. Barr) 소장>, 한국 해병데 제1연대 (사령관 신현준 해병대 대령), 한국군 육군 제17연대 (연대장 백인엽 대령)등 총병력 75,000명으로 편성하였고, 인천항의 확보와 해안 교두보 점령, 가능한 한 신속히 진출하여 김포비행장 확보, 한강도하 및 서울 탈환, 美제8군과 연결 작전이 이루어지기까지 서울 근교의 진지 점령이라는 임무가 부여되었고, 상륙작전을 결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극동해군은 제7합동 기동부대를 구성하였다.

9월 15일 새벽, 제7합동기동부대 스트러블(Arthur D. Struble) 해군제독의 지휘아래 항공모함, 구축함, 순양함 등 8개국 261척의 함정과 제10군단으로 편성된 대규모선단이 인천앞바다에 집결하였고 월미도에 상륙 돌격을 감행할 미국 제5해병대 제3대대 상륙단의 선견공격대가 인천수로에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인천해안교두보를 확보한 미국 해병대 제1사단은 9월16일부터 한강으로 진격을 개시하였다. 9월 18일 부터는 후속부대인 美육군 제7사단과 한국 육군 제17연대가 상륙하여 서울 수복과 적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하였고, 9월 27일 한국 해병대가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한 후 소탕전을 전개하여 9월 28일 수도 서울은 90일 만에 수복되었고, 인천상륙작전은 한반도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한 역사적인 작전이 되었다. 

  
▲ 맥아더 장군은 적 보급로의 취약점과 한반도의 지리적 여건을 분석해 서울만 점령하면 전쟁의 주도권을 마련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북괴군 병참선과 퇴로를 차단했다./사진=영화 '인천상륙작전' 스틸컷


2. 인천상륙작전의 역사적 업적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수도 서울을 탈환하는 발판이 됐을 뿐만 아니라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 주력 부대를 포위, 붕괴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더구나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유엔군과 국군은 상대적으로 적은 인명 피해로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만약 인천상륙작전 없이 낙동강에서 38선으로 단계적으로 북상했을 경우 소요시간은 30일, 아군 인명 피해는 13만 9957명에 달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미군 측의 평가였다. 2)

실제로 인천상륙작전 후 38선까지 도달하는 데 유엔군과 국군이 입은 전 · 사상자는 8478명에 불과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없었을 때의 추산치와 대비해 겨우 6%에 불과한 인명 손실만으로 전세 역전에 성공한 것이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양영조 박사는 바로 이점이 인천상륙작전의 가장 중요한 성과 중 하나라고 본다. 

양영조 박사는 “낙동강에서 단순히 총반격으로 38선으로 올라갔을 때와 비교할 때 불과 10여 일간의 전투로 서울 탈환에 성공해 전체 전투일수를 3분의 1로 줄였을 뿐만 아니라 아군 병력 14만여 명과 국민 200여만 명의 피해를 줄인 것으로 평가된다.”고 인천상륙작전의 의의를 평가했다. 

인천상륙작전의 또 다른 의미는 핵무기의 등장과 함께 그 중요성이 평가 절하되던 상륙작전의 유용성이 다시금 부활한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과 유럽에서 미군이 전세를 역전시킨 발판은 모두 상륙작전이었다. 하지만 핵무기가 개발된 이후 상륙지점에 단 한 발의 핵무기만 떨어져도 상륙부대가 전멸될 것이라는 생각에 상륙작전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하지만 인천상륙작전은 이런 편견을 보기 좋게 깨며 상륙작전이 시기적절한 상황에서 실행될 경우 여전히 유용하다는 점을 재확인시켜 줬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군과 중공군은 전체 18개 군단급 부대 중 무려 9개 군단을 동해안과 서해안에 배치해야 했다. 이 때문에 6·25전쟁 전문가들은 “유엔군의 또 다른 상륙작전에 대비하기 위해 공산군 측은 무려 전력의 50%를 후방에 배치해야 하는 뼈아픈 상황에 빠져든 것” 이라고 평가한다. “바로 그 점에서 인천상륙작전은 단 한 번의 작전 성공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전쟁 전체의 흐름에 영향을 미친 6·25전쟁의 결정적 작전 중 하나” 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은 극심한 밀물과 썰물의 수심 차이, 새벽과 오후 두 단계로 나눠 상륙전을 진행해야 하는 특수한 해양 환경, 항구 안벽으로 상륙전을 감행해야 하는 제약 등 수많은 제약사항을 극복하고 이뤄진 작전이란 점에서도 의미가 적지 않다. 모험적인 작전을 무조건 긍정적으로 볼 수는 없지만 “적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조건에 아군의 성공 비결이 있다”는 오랜 군사 격언을 20세기 전쟁에서도 다시 입증 했다는 점에서 군사적 의미가 크다고 볼 수있다. 3)

1950년 9월 15일 새벽 5시 美해군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함재기들이 인천항 앞 월미도에 맹렬한 폭격을 가하면서 인천상륙작전의 서막이 열렸다. 5시 50분부터 순향함의 함포 사격이 개시됐다. 6시 30분 美10군단 예하 해병1사단 5연대 3대대가 상륙을 시작, 월미도에 설정된 상륙예정 장소인 그린비치(Green Beach)에 발을 내딛는 데 성공했다.

  
▲ 인천상륙작전이 개봉한 후 전문가들의 평점이 3점 때에 머물고 있다. 일반적인 영화평 이라면, 최소한 정상적인 시나리오를 통해 제작된 “인천상륙작전”과 같이 누가 보더라도 작품성과 완성도가 훌륭한 영화가 3점 때라는 것은 악평을 넘어 뒤틀린 감정이 잔뜩 실려 있다는 결과밖에 나올 수 없다./사진=영화 '인천상륙작전' 스틸컷


3. 인천상륙작전이 남긴 교훈

북한의 무력남침을 알리는 UP통신과 주한 미국대사관의 긴급보고가 미국에 타전 됐을 때 이 전쟁을 예측하지 못했던 미국은 오히려 신속하게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평화를 침해하는 행위’로 규정했고, 당시 태평양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은 전쟁 발발 나흘째인 6월 29일 전장을 시찰했으며, 이때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하게 됐다. 4) 

그러나 美합참에서는 여러 가지 조건 때문에 인천상륙작전을 포기하거나 군산으로 할 것을 종용했지만, 맥아더 장군은 美8군이 낙동강 교두보를 끝까지 확보할 수 있다는 것과 인천상륙작전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강한 집념을 보임으로써 작전 개시 불과 1주일 남겨두고 승인을 받게 되었다.

인천은 자연적으로 상륙에 부적합한 장소였지만 서울과 불과 40km의 거리로서 서울을 점령했을 때 북한군의 병참선을 완전 차단하며, 심리적인 승리를 확실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인천상륙작전은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에서 공세로 전환해 북한군을 포위망에 가둬 망치로 섬멸하겠다는 작전이었다.

즉 경인지역의 美제10군단이 모루가 되며 낙동강의 반격작전의 성공으로 전쟁의 주도권을 탈취하고 행동의 자유를 유지했으며, 낙동강 방어선의 취약성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을 전략 · 전술적으로 분석해 본다면

첫째, 낙동강 방어선에 투입돼 있는 북한군 1, 2군단의 주력이 인천으로 전용되지 못하도록 견제하고 적의 배후를 지향해 기동을 실시, 물리적 · 심리적 교란을 달성해 유리한 전략적 상황을 조성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의 주도권을 탈취하고 행동의 자유를 유지 했으며 낙동강 방어선의 취약성을 극복할 수 있었다.

둘째, 인천상륙작전은 전투 기간 20일을 앞당기고, 11만 명의 손실을 방지해 최소전투에 의한 승리가 가능했다. 또 전략적으로 인천 교두보를 확보해 서울을 점령함으로써 적의 퇴로와 병참선을 차단해 물리적 교란효과를 달성할 수 있었고, 낙동강 전선의 적에게 심리적 혼란을 야기해 저항의지를 상실케 했으며 수도 서울의 탈환이 한국인에게 심리적으로 미치는 유리한 전략적 상황을 조성할 수 있었다.

셋째, 맥아더 장군의 창의적인 군사전략과 승리에 대한 강한 집념과 용기가 승리의 결정적 요인이 됐다고 할 수 있다. 맥아더 장군은 적 보급로의 취약점과 한반도의 지리적 여건을 분석해 서울만 점령하면 전쟁의 주도권을 마련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북괴군 병참선과 퇴로를 차단했고,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의 강한 신념이 결정적인 승리의 요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5) 

  
▲ 인천상륙작전은 극심한 밀물과 썰물의 수심 차이, 새벽과 오후 두 단계로 나눠 상륙전을 진행해야 하는 특수한 해양 환경, 항구 안벽으로 상륙전을 감행해야 하는 제약 등 수많은 제약사항을 극복하고 이뤄진 작전이란 점에서도 의미가 적지 않다./사진=미디어펜


결론 : 한국 문화계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권위의 부정을 통한 자기서열 올리기6)

19세기 유럽사회에 큰 충격으로 다가온 세계 공산주의 운동은 시간이 경과하면서 하나의 변화가 일어났다. 즉, 혁명만이 공산주의를 실현하는 유일한 방법7) 이라고 믿는 기존의 혁명주의자들과는 달리, 자유주의 체제하에서도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통해 사회주의적 이념을 실현할 수 있다는 非혁명주의자들이 출현한 것이다. 이들의 노선을 소위 '수정주의(Revisionism)’ 라고 부른다. 1840년대 이후 마르크스의 혁명 이론은 유럽사회에 있어서 강력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이르러 영국을 위시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 호전과 자유민주주의 제도에 보통선거 제도의 도입, 사회복지정책의 확대 및 노동조합의 활성화 등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혁명의 불가피성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혁명 회의론에 대한 이론을 제공한 학자가 독일의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 이었다.

베른슈타인은 당시 유럽의 자본주의를 분석하면서 마르크스가 예언한 자본주의의 붕괴가 실제로 어렵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마르크스의 혁명 이론에 반기를 들었다. 특히 그는 마르크스의 혁명 이론은 유토피아(Utopia)적이라고 설명하면서 사회주의자들은 부르주아 사회를 대신하여 무산자 사회(Proletarian Society)를 건설할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시민사회(Society of Universal Citizenship)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른슈타인은 한마디로 프롤레타리아의 혁명 독재를 비판하면서 민주적이며 점진적인 사회 개혁을 통하여 사회주의의 목표에 도달해야 함을 역설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베른슈타인의 주장은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져 많은 공산혁명주의자들에 의해 비판을 받기도 하였지만, 당시 독일의 사회민주당은 베른슈타인의 이론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오늘날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서유럽에 존재하고 있는 사회주의 정당들이 베른슈타인이 주장한 수정주의의 후예들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한국사회에서 진보라는 용어는 수정주의적 흐름을 인식한 상태에서 논의하는 것이 타당하다. 실제로 서구 정치철학에서 보수의 상대어로서 진보(Progress)라는 용어는 생소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가 우리 사회에서 진보라는 용어를 제일 먼저 사용하였으며, 그 진정한 의미가 무엇으로 이해되어 상용되기 시작하였는지 역시 매우 애매하다. 

다만 작금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진보라는 의미는 공산혁명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고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통해 사회주의 이념을 실현해 보자는 정도의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한국의 진보란 서구의 수정주의와 그 모양새만큼은 갖추려고 '발버둥’ 친다고 볼 수 있다. 

  
▲ 1950년 9월 15일 새벽 5시 美해군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함재기들이 인천항 앞 월미도에 맹렬한 폭격을 가하면서 인천상륙작전의 서막이 열렸다. 5시 50분부터 순향함의 함포 사격이 개시됐다./사진=미디어펜


이러한 19세기 유럽사회의 이념논쟁의 등식을 한국 문화계에 적용시킨다면 어떤 그림이 그려질까? 영화 한편에 대한민국 건국 이래 지겨우리만치 지속되는 전체주의 사회로 부터의 물리적 · 정신적 위협과 역사적 가치를 뛰어 넘어 문명사적으로도 검증받고 세계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전쟁과 작전을 폄훼함으로써 얻어지는 집단들의 심리를 파고들어 가다보면 마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단면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심리학과 정치철학을 넘어 군중심리를 설명하는 단계로 정치경제사에서도 심심치 않게 다뤄지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이면에는 단순히 부계권력을 제압하고 모성을 독점하려는 심리뿐만이 아닌 역설적으로 부계권력의 관심과 영향력을 동시에 차지하므로 써 유아기에 생성되는 과도한 욕심, 도덕적 차원을 허물어뜨리고 느낄 수 있는 배덕(背德)적 감성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부계(父系)권력 이라는 상대하기 버거운 대상에 대한 막연한 증오(Invisible Anger)를 퍼부으므로 증오의 대상의 실체야 어떻든 도덕적, 물리적 폄훼는 자신의 현실 부정적 도피처로써 규정(規定)하기에 매우 좋은 표적이 되는 것이다.

다시 인천상륙작전이라는 영화로 돌아가 보자. 앞서 설명한 등식은 한국문화계 구성원들의 기본 심리가 아닐까 짐작해 본다. 권위의 부정과 특정 대상에 대한 증오는 또 다른 접근방법에서의 기회를 의미한다. 철학적, 역사적 베이스가 부족한 인물들, 또는 사실(Fact)8) 에 대한 접근방식에서부터 이미 결론을 도출해 뒤틀린 선동을 하는 집단들 이라면 더욱더 한국전쟁과 인천상륙작전이라는 성공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낸 역사적 사실들이 불편할 것이다. 

그러나 오이디푸스 왕이 '델포이의 신탁소’에서 의도하지 않게 부친을 살해한 후 자책을 했다면, 문화계의 악평을 쏟아내는 인물들은 자신들이 공격하고픈 대상에 대한 설정을 미리 해놓고 증오를 퍼부어 대며 자신의 서열을 올리고픈 욕망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는 것만 다를 뿐이다. 한국의 자칭진보들은 유럽의 수정주의에 대한 제대로 된 해석과 이론적 무장을 한 적도 없이 막연한 권위의 대상을 끌어내리므로 유아기적 쾌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영화가 개봉한 후 전문가들의 평점이 3점 때에 머물고 있다. 일반적인 영화평 이라면, 최소한 정상적인 시나리오를 통해 제작된 “인천상륙작전”과 같이 누가 보더라도 작품성과 완성도가 훌륭한 영화가 3점 때라는 것은 악평을 넘어 뒤틀린 감정이 잔뜩 실려 있다는 결과밖에 나올 수 없다. 어찌 보면 이러한 현상은 문화계가 가진 생존본능일수도 있다. 

그 생존본능은 대중으로부터 철저히 멀리 떨어진 평을 내면서 정작 그로테스크하고 데카당스 적인, 쉽게 말해 대중이 해석하기에 조금은 난해한 영화(작품)에 잔뜩 높은 평점을 내려놓고는 마치 3차 대전에서 승리라도 한 개선장군인양 으스대며 못돼먹은 패거리 근성을 보란 듯이 드러내고 지적수준이 높은 문화시민인양 너스레를 떠는 평론가들의 인생관을 일컫는다. 그렇지만 정작 그런 문화계 인사들이야말로 역사적 해석능력과 지식이란 천박하기 짝이 없고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올해는 인천상륙작전 66주년이 되는 해이다. 문명이 존속하는데 가장 중요한 가치인 상무정신(尙武精神)을 천박하게 여긴 조선의 말로는 참담했지만 대한민국 건국이후 벌어진 '우리’의 역사는 인류사적으로나 세계사적으로도 유래가 없을 만큼의 획기적인 경제발전과 2016년 현재 세계 10대 군사강국의 위용을 과시하는 국가 대한민국의 역사가 만들어졌다. 

그 바탕에는 한국전쟁과 인천상륙작전이 있다. 아무리 문화적 담론이 자유를 담보한다고 할지라도 희화시킬 대상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의지는 그 위대한 가치를 만들어낸 보이지 않는 희생자에 대한 묵념과 존경을 표시할 때이다. /임종화 경기대 무역학과 객원교수

1) 유영옥, 한국보훈논총 제9권 제2호 (2010년)

2) 조병희 (국방일보, 2010. 09. 15)

3) 임종화, 이재평 (2015) : 재미있는 전쟁사 : 글로벌 출판사 

4) 조병희 (국방일보, 2010. 09. 15)

5) 유영옥, 한국보훈논총 제9권 제2호 (2010년)

6) 여기서의 권위는 대중에게 검증받은 매개를 지칭한다. (인천상륙작전 같은 영화) 

7) 마르크스 본인도 이 방법을 신뢰한 적은 없다.

8) 그것이 역사적 해석이라면 더욱더 그럴 것이다.


(이 글은 자유경제원 '현안해부' 게시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임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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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10
8007 [보도]영화 인천상륙작전, 세 번 눈물 흘린 까닭은?
자유경제원 / 2016-08-10
2016-08-10
8006 [보도]터널·세월호 억지 꿰맞추기…손석희·JTBC는 답정너?
자유경제원 / 2016-08-10
2016-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