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이 스스로를 속이도록 가르치는 나쁜 어른들
<방송개요>
● 매체: 중앙일보
● 칼럼 제목 : 한국 청년 잔혹사
● 저자 :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 교수
● 게재 일자: 2016년 08월 09일 (화) 19:29
요즘 언론 칼럼에서 이런 류의 글을 자주 본다. 그 중 청년과 관련된 글 하나를 대표로 이런 주장의 허구성을 지적해본다. 언어의 모호성을 이용한 의미 없는 글이라고 본인은 생각한다. 저자 송호근의 주장을 반박해 보고자 한다.
국어사전에 휴가란 ‘직장ㆍ학교ㆍ군대 따위의 단체에서, 일정한 기간 동안 쉬는 일. 또는 그런 겨를’이라고 나와 있다. 저자는 먼저 휴가란 어딘가로 떠날 때만 의미가 있는 것으로 정의를 하고 있다. 힐링도 그 자리에서는 해 낼 수 없는 것인가보다. 그렇다면 힐링을 얻기 위한 휴가는 어디로 떠나야 하는 것일까? 나는 자기 자신의 자리에서 얻을 수 없는 안식을 어디에서 얻을 수 있는지 궁금하다.
또 떠나는 사람만이 승자이고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 패배라는 논리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개인적이지만 나는 긴 연휴나 휴가철에는 되도록이면 떠나는 것을 자제한다. 길 위, 북적이는 곳에서 낭비되는 시간들이 아깝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꽉 막히는 고속도로를 타는 맛으로 떠난다면 나는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요즘 사회인들은 멀리 어딘가로 떠나지 않고서도 휴가를 잘 즐긴다.
저자 송호근 교수는 도심을 지키고 있는 것을 왜 청년들로 한정하고 있는지 나는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전국 방방곡곡 해변, 계곡, 산골에 있는 것은 중장년 혹은 어린이들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인가? 도대체 해운대에 쏟아지는 그 인파, 워터파크를 가득 채우고 있는 그들은 어느 별에서 온 이들인가? 만약 여기 있는 이들이 전부 저자가 지적하는 대로 경제력이 충분한 이들만 떠난 것이라면 청년실업은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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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로 청년이 약자인 나라라면 이 나라는 미래가 없다. 나라의 기둥이 약하기 때문이다. 내가 본 청년들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청년수당을 내걸은 정치인들의 포퓰리즘은 여전하다. 청년들이 스스로를 약자로 속이도록 하는 정책만 없다면 우리 기둥은 끄떡없다./사진=연합뉴스 |
또 고등학생 200만명과 16~29세 청년세대가 텅 빈 도심을 지켰다는 것도 정말 지나친 비약이다. 고교생들이야 입시준비로 바빠 평소에도 도심에서 마주칠 일이 거의 없고, 그 넓고 큰 도시를 지키고 있는 이들이 고작 16~29세 청년들 뿐이라니 나로서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는다. (지루한 논의를 피하기 위해 저자가 16~29세를 청년으로 정의하고 있다는 점은 논의에서 제외하기로 한다)
프랑스의 '휴가 향유권'에 관해서도 나는 이의가 있다. 권리란 의무로부터 나오는 법이다. 인간의 일생 중 가장 건강하고 의욕적인 세대에게 어떤 권리가 주어진다면, 그 권리를 위한 의무는 필연적으로 그보다 약한 다른 세대에게 분산됐다는 뜻이 된다. 청년에게 주어지는 권리를 위해 응당 의무를 질 세대는 누가 돼야만 하는가? 청년이 약자라면 어린이도, 노인도, 장년도 모두 약자다. 청년의 권리를 위해 약자들에게 의무를 부담시키는 것이 정의로운 것인가?
'여가여권', '청년수당'과 같은 위대한 정책들은 아름다운 말로 우리를 유혹한다. '청년을 위한 나라'인 우리에게 어서오라고 손짓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부를 생산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정책가들은 자신이 번 돈이 아니라, 세금을 내는 이들로부터 받은 돈으로 정책을 펴고 자선행위를 한다. 정부가 하는 위대하고 아름다운 행위는 모두 누군가의 희생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정부가 너그러운 수당을 퍼주면 줄수록 한쪽에서는 수당을 받는 그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국민들의 고혈을 더욱 더 쥐어 짜내야만 한다.
그리고 송호근 교수가 말하는 나라들은 정말 '돈'이 많아서가 아닌가? 왜 저자는 아프리카의 예나 남아메리카의 예, 동남아시아의 예, 동유럽의 예는 대질 못하는지 의문이 생긴다. 저자가 말하는 국가들은 모두 자유시장경제를 지지해 정부 수입이 충분한 국가들이다. 왜 저자가 예로 드는 국가들은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면서 돈이 많은 국가들뿐일까.
만약 휴가와 여가가 시민교육이라면, 지금 당장 전국에 휴교령을 내리자. 휴가와 여가로도 시민교육이 되는데 쓸데없이 세금 내가며 학생들을 교육시키고 있는가? 그렇게 시민정신이 길러지고, 공존사회가 만들어진다면 교육제도자체가 필요 없다.
또 그게 어떻게 보험금이 되는가? 기성세대가 그 자신의 미래를 위해 보험료를 냈다고 치자, 그럼 그 보험금은 당연히 자신을 위해서 사용 돼야만 한다. 그리고 그 투자에 관한 이익과 손실도 온전히 보험료를 낸 이들의 것이다. 만약 보험료를 낸 이들이 동의하지 않음에도 누군가 그 보험금을 부정하게 타 간다면, 우리는 그것을 부정수급이라 불러야 한다. 청년들은 졸지에 부정수급자가 되고 마는 것인가? 청년들은 미래의 기성세대의 삶을 왜 책임져야 하는가? 청년들은 돈을 달라고 한 적도 없다. 기성세대는 주라고 한 적도 없다. 누구도 원한적도 명령한 적도 없는 일이 법의 이름으로 권리가 생기고 의무가 생기는 것은 이미 법이 아니다.
또한 저자가 말씀하신대로 한국에도 이미 이런 지원금이 있다. 여행을 지원해주는 장학금도 있다. 서술한대로 종류도 많다. 그런데 나는 의문스럽다. 청년들의 상황이 어렵기 때문에 사회적약자인 청년을 돕자고 해놓고, 왜 그 청년들 중에서 약자인 자들을 먼저 돕자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지 주장이 일관적이지 않다. 독일의 연방고용청이나 스웨덴의 노동시장국처럼 총괄체계를 만들면 실업률이 0%가 되는가? 소정의 생계비란 도대체 얼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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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순 서울시장의 청년수당. 144만명중 3천명에 들기 위해선 100명 중 0.2%안에 들어야하는 치열한 경쟁이 시작된다. 자그마치 500:1의 경쟁이다. 이런 정치적 경쟁은 사소한 이쑤시개하나 생산하지 못하고, 아무런 경험도 없으며 정치에 관한 불신감만 조장한다./사진=연합뉴스 |
송호근 교수에게 나도 묻고 싶다. 저자의 주장대로 144만명중 3천명에 들기 위해선 100명 중 0.2%안에 들어야하는 치열한 경쟁이 시작된다. 자그마치 500:1의 경쟁이다. 이런 정치적 경쟁은 사소한 이쑤시개하나 생산하지 못하고, 아무런 경험도 없으며 정치에 관한 불신감만 조장한다. 이런 정책이 만들어지고 집행될 때마다, 선택받지 못한 99.8%는 정부를 저주하게 된다. 청년적응수당이 생기면 위화감이 조성되지 않겠는가? 부당하게 선택받지 못해서 생기는 것이 위화감이란 것을 정말 모르시는 것인가?
또 공공산후조리원이 청년정책인가? 도대체 청년이란 뭔가? 선진국들이 짜낸 프로그램 명칭은 다양하고 긴만큼 입 발린 소리일 뿐이다. 그런 선진국에서는 청년실업이 없나? 복지는 완벽하게 실행되고 있는가? 결코 아니다. 청년문제의 본질은 적절한 일자리가 희소한 것에 있다. 그런 일자리는 정부가 제공할 수 있는가? 없다, 그래서 기업들이 필요한 것이고 경제위기 상황에서 기업에 도움을 줘 일자리가 생길 수 있다면 지원할 수 있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기업을 지원한 것이지만 그 효과로 일자리를 새로 얻는 이들도 생기는 것이다.
송 교수는 개인들의 삶을 자꾸 종이 위에서 바라보고 판단하려고 한다. 100년 전의 50대와 100년 후의 50대는 나이테는 똑같이 50이지만 생활수준과 노동력 등 질적인 면에서 전혀 같다고 단언할 수 없다. 조선시대 50대는 중늙은이였지만, 지금의 50대를 보고 누가 늙은이라고 표현하는가? 늙음은 단지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왜 10~29세가 50대 이상을 먹여살려야한다고 생각하는지 도대체 모르겠다. 노동으로 소득을 버는 이들과 자본으로 소득을 버는 이들은 연령과는 관계가 없다. 경험과 자본이 없는 청년층에게 노동소득이 주가 되는 경향이 있고, 시간을 자본과 경험으로 바꾼 장년층들이 자본소득이 주가 되는 경향이 있을 뿐이다. 사회에 이런 자본이든 노동력이든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늙은이들이 많은 사회가 왜 나쁜 사회인가?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늙은이들은 산전수전 다 겪은 경험과 자본 모두 튼튼한 이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룬 토양위에서 자란 청년들도 이전세대와는 질적으로 다른 노동력을 갖고 있다.
청년수당을 안준다고 청년이 불볕더위로 몰아넣는다니, 정말 해도해도 너무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명력, 노동력은 누가 보살피고 끊임없이 관심을 주지 않아도 그 자체로 무한히 성장하고 발전한다. 오히려 너무 많은 관심이 자라는 생명에게 해가 되기도 한다. 화초를 기를 때도 물을 적게 줘서 죽기보다 물을 너무 많이 줘서 죽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청년들에 대한 관심이 실제로는 관심이 이라는 이름의 ‘간섭’이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자신의 삶의 문제는 결국 자신이 해결하게 돼 있다. 청년 문제도 청년 자신이 해결한다. 옆에서 감 놔라 배 놔라하는 이들만 없으면 청년들은 이때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훌륭하게 문제를 해결해낼 것이라고 자신한다. 정말로 청년이 약자인 나라라면 이 나라는 미래가 없다. 나라의 기둥이 약하기 때문이다. 내가 본 청년들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청년들이 스스로를 약자로 속이도록 하는 정책만 없다면 우리 기둥은 끄떡없다. /손경모 자유인문학회 회장
(이 글은 자유경제원 자유북소리 '언론고발' 게시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손경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