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원고는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회보 2014년 7월호(Vol.40)의 내용을 전재함* 1)
1. 역사 속에 잊혀진 박정희 성공원리
박정희 시대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지 40여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 동안 대부분의 국내 정치학계는 물론 경제학계마저도 박정희 시대의 성공을 부정, 혹은 폄하하는 것이 대세였고, 정치권에서도 진지하고 객관적인 평가와는 거리가 먼 찬반의 첨예한 정치적, 이념적 평가만 난무하고 있다. 여기서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 동안 박정희 시대의 성공을 부정 혹은 폄하하는 것이 마치 소위 민주 지식인의 사명인 것처럼 치부되어왔음도 부정하기 어렵다. 이미 한국사회에서 박정희 시대의 성공과 그 성공원리는 있든 없던 교훈으로 배워야할 대상이라기보다는 극복, 청산되어야 할 대상이 된지 이미 오래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역으로 국제적으로는 그동안 많은 나라들이 한국이 이룬 한강의 기적을 배운다고 애를 쓰고 국내외 관련 연구기관들이나 일부학자들은 박정희 성공정책들을 후진국들에 전수한다고 요란을 떨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박정희 성공전략의 진수가 무엇이냐, 혹은 박정희주의가 있기나 한 것이냐 물으면 어느 누구도 시원한 답을 하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의 학계의 현실이다. 보다 현실적으로 묻는다면, 국내 각종의 해외개발지원기관이나 관련 연구기관들이 그렇게 많은 예산과 인력을 쓰면서 해외 지원사업을 해왔는데도 꼭 짚어 우리의 경험전수가 경제적 도약에 가시적인 기여가 되었다고 내세울 만한 나라나, 아니면 개별 사업의 경우라도 성공사례들이 그동안 얼마나 있었는지 묻는다면 시원한 긍정적 답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예컨대 그동안 수도 없이 새마을운동을 해외에 전수한다 애를 써왔지만 한곳이라도 지속가능한 운동으로 제대로 정착되어 국가발전에 가시적 기여를 하고 있는 나라가 한 나라라도 있는가? 단순히 박정희의 정책이나 사업의 전수가 아니라 이들 성공정책이나 사업의 바탕에 흐르는 성공원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느냐가 관건임에도 이 원리를 구명하는데 실패하고 있기 때문에 노력에 비해 성과가 부실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필자의 눈에는 박정희를 부정하는 사람들이나 인정하는 사람들이나 모두 “박정희성공원리”의 객관적 실체에 대한 진지한 구명(究明)노력보다는 각자의 도그마화된 이념이나 혹은 특수한 이론적 시각에서 자기들 구미에 맞게 “허수아비 박정희”를 그려놓고 비판하기도 하고 칭찬하기도 하는 반(反) 실사구시(實事求是)적인 자기만족적 해석에 안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박정희 부정의 근거와 논리, 그리고 허점들
2-1. 박정희 시대 성공의 특징: 불편한 진실
박정희 시대는 무엇을 만들어냈는가? 여기서 박정희 시대가 만들어낸 경제적 결과를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높은 성장률이나 분배와 같은 거시적 성과지표가 아니라 그 시대의 정책과 그 정책들이 만들어낸 한국경제의 구조적 특징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거시적 성과 면에서 박정희 시대는 성장과 분배 모든 면에서 세계은행이 확인하고 있는 바와 같이 당시로는 세계최고의 양호한 성적을 냈음에도 이를 평가하기보다는 구조적 문제라든가 경제외적 요인 등 여러 가지 이유로 폄하하는 것이 대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박정희 시대에 대한 찬반논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위 불편한 진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박정희 시대 한국의 경제발전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로, 주류경제학에서 폐기처분한 정부주도 산업정책을 통해 성장했다.
둘째로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를 제약한 비민주적 정부에 의해서 성장했다.
셋째로 친 재벌정책으로 경제력 집중과 기업부문의 불균형을 초래했다.
넷째로 지역 간 불균형 발전을 초래했다.
박정희 경제적 성공은 거시지표에 의해 쉽게 확인되지만 문제는 위와 같은 일부 특정 정책이나 성공에 수반하는 구조적 특징이 바로 찬반 논란의 중심에 있는 것이다. 바로 이 네 가지의 특징이 박정희 부정의 원천이 되고 있다.
2-2. 박정희 부정의 논리
박정희 부정은 신고전파 주류 경제학계에서부터, 정치경제학계 나아가 정치계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전 사회과학 분야와 사회전반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데 위의 4가지 특징을 통해 그 실상을 규명해 볼 수 있다.
2-2-1. “시장을 신”으로 보는 주류 신고전파 경제학계와 자유주의 경제학계의 반박정희 논리
우선 주류 신고전파 경제학계는 첫째특징에 가장 불편해 한다. 주류경제학은 이미 오래전부터 정부주도 산업정책은 성공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폐기되어야할 정책이라고 가르쳐왔다. 박정희는 수출진흥정책이나 중화학 공업육성정책 등에서 바로 경제학이 하지 말라는 정책을 한 셈이기 때문에 주류 경제학계는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나아가 주류경제학과 연계된 시장중심의 자유주의 경제학계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산업정책이 바로 시장보다 정부의 역할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경제적 자유의 제약을 수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주류 및 자유주의 경제학계에게는 두 번째 특징에 대해서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여기서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더 곤혹스럽다. 박정희 시대를 경제적 자유가 신장된 시대라 부를 수는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경제적 자유가 없어도 경제가 발전한다니, 자유주의 경제학계가 수용하기는 어려운 명제이다. 물론 이들의 경우 지금의 중국의 발전에 대해서도 썩 그럴 듯한 설명을 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또한 세 번째 불균형도 수용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다. 재벌을 육성해서 독점기업은 물론 한국경제의 온갖 정치경제적 문제의 원천을 만들어 내었으니, 독점자는 없어야 하고 모두가 규모가 같고 평등하고 균형된 완전경쟁시장을 최상의 시장이라 보는 주류 및 자유주의 경제학계의 입장에서 보면 이 결과 또한 수용하기는 어렵게 된다. 더구나 반중소기업정책으로 중소기업성장 기반을 약화시켰으니 더더욱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것이다. 네 번째 지역불균형문제는 이를 명시적으로 부정하는 주류경제학이론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정치경제학에 치우쳤던 과거 경제발전론이 균형성장을 강하게 지지해온 전통 때문에 아직도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많다. 이렇게 보면 주류 경제학계와 자유주의 경제학계는 그 들이 신봉하는 경제학 논리 때문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박정희 성공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게 된다. 이런 상황은 아직도 한국의 경제발전 경험을 예외적 현상으로 치부하고 있는 세계 주류경제학계도 마찬가지이다. 박정희는 결과적으로 경제발전을 이루었지만 우리 이론과 신념에 맞지 않는 방식으로 해서 이해할 수도 없고 지지할 수도 없다는 입장인 셈이다.
2-2-2. “민주주의를 신”이라 보는 정치학계, 정치계의 반박정희 논리
한편 민주주의를 신격화하는 정치학계나 정치계는 군사 쿠데타, 유신 등 민주질서에 반하는 정치를 했기 때문에 어떠한 경제적 성공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자유민주주의 질서에 반하는 어떤 정치도 그 성과에 관계없이 배격되어야 한다는 극단적 주장도 있지만 어느 정도 경제적 성과를 인정해야한다는 현실 타협적 입장도 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도 박정희 시대의 권위주의적 정치가 어떠한 경제적 의미를 갖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박정희 시대를 올바로 평가하는 데는 실패하고 있다. 셋째, 넷째 불균형에 대해서도 평등의 민주정치 이상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본다. 결국 민주주의를 신격화하는 정치학계나 정치계의 경우는 박정희가 민주주의 이상인 자유와 평등, 모두에 반하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박정희 성공을 인정하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2-2-3. 좌파들의 반박정희 논리
경제적 평등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좌파경제학자들에게 박정희는 양날의 칼이다. 중소기업에 불리한 대기업, 재벌경제를 만들어내어 기업생태계의 불균형을 초래하고 지역발전의 불균형을 초래하는 등 경제적 불평등을 조장한 박정희 패러다임은 인민의 적인 셈이다. 그러나 큰 정부가 부의 재분배와 규제정책을 통해 보다 평등한 경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리를 주장하는 좌파입장에서 정부의 적극적인 산업정책역할을 중시한 박정희패러다임을 온통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일부 좌파경제학자들은 박정희산업정책을 옹호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실패한다는 산업정책이 왜 성공했는지 설명하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고 그저 시장이 하느님이라는 자유주의 경제학계에 대한 반론으로 정부가 하느님이라고 주장하는 데 그치고 있다. 가끔 박정희 산업정책의 성공을 인정하는 장하준 교수가 이에 해당한다.
2-3. 반박정희 논리의 허점들
반박정희논리는 이와 같이 다양한 관점에서 제기되고 있고 논리적으로 난공불락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이 모든 논리가 각 자의 이론이나 이념에 비춰 박정희 정책이나 그 성공이 수반한 결과를 평가하고 있다는점이다. 즉 도그마화된 자기 안경으로만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은 그럼 이들이 기준으로 삼고 있는 이론이나 이념은 옳은 것인가, 혹은 다른 말로 그럼 이들 이론이나 이념을 따르면 궁극적으로 경제발전이 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부정적이면 이들의 평가는 올바른 평가일 수 없고 실사구시적 학문태도와는 거리가 먼 그저 자기도그마에 빠진 자기만족적 평가에 그치고 만다.
2-3-1. 질문1: 자유시장 만의 힘으로 성공한 경제가 있는가?
경제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지속적인 경제발전과 소득증대현상은 19세기 산업혁명이후 최근 200여년의 역사에 불과하며, 인류는 그 이전까지 수천만 년을 겨우 생계유지도 어려운 빈곤 속에 살았다. 그럼 전문화와 교환경제의 맹아가 싹튼 1만 5천 년 전의 수렵과 채집시대이후 산업혁명이전까지 소위 시장경제 속에서 살아온 인류는 왜 그리도 오랜 세월동안 맬서스적 빈곤의 함정에 빠져 가난을 못 벗어났는가? 한편 지금의 서구 선진국들은 19세기 산업혁명을 통해 경제적 도약을 이루던 시절 시장제도를 도입하면서도 왜 모두가 정부의 산업육성 정책에 매달렸는가? 20세기이후 경제도약을 이룬 나라는 왜 하나같이 덜 시장중심적인 나라에서 대부분 산업육성정책을 통해 일어섰는가? 오늘날 지구상에 북한 말고 시장경제를 도입하지 않은 나라가 없는데도 지구상 200여개의 나라 중 일인당 소득이 만 불을 넘어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한 나라가 1/4 정도에 그치고 있음은 어떻게 설명해야하는가? 도처에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시장경제가 널려있지 않은가? 도대체 시장은 다 어디가고 지구촌 곳곳의 가난은 방치되고 있는가? 자유시장을 신봉하는 자유주의 시장경제론자들과 주류 경제학은 이들 질문에 대해 답을 해야 할 것이다.
자유시장경제의 근본은 경제적 자유와 사유재산권제도이다. 정부가 할 일은 이런 제도적 창치를 마련할 뿐 산업정책 등을 통해 직접시장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런데 그동안 가시적 경제발전성과를 보여 온 대다수의 나라들은 왜 한결같이 경제적 자유의 신장보다 정부의 산업정책을 중시해온 나라들인가? 지금의 중국은 얼마나 경제적 자유를 허용하고 있는가, 연평균 9%넘는 30년간의 성장이 자유시장 경제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오늘날 선진국들마저도 국제기구를 통해 공식적으로는 정부의 개입을 금지하면서도 왜 한결같이 눈에 보이게 안 보이게 산업육성정책을 시행하고 있는가? 자유시장 경제론자들은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도 시원한 답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자유시장 경제이론은 이상의 관찰과 질문에 대해 별 신통한 설명을 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불행하게도 시장경제이론은 “주어진 자원과 부의 최적배분원리”로서 최상의 정치성을 뽐내어 경제과학(economic science)이라고 노벨상까지 받고 있지만 불행하게도 “새로운 자원과 부의 창출원리”, 즉 경제의 발전이론으로서는 현실 설명력을 잃고 있다. 이론상의 시장, 즉 완전경쟁시장은 이미 신처럼 도그마화가 되었으나 아직도 빈곤과 기아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현실의 경제성장과 발전의 해법은 오리무중인 셈이다. 배분경제학(allocation economics)을 넘어 더 높은 차원의 발전경제학(development economics)은 아직도 암중모색 중이다. 또한 자유는 그 자체로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일 수 있지만 이것이 자동으로 경제발전을 보장하지도 않는 것이다. 자유도, 경제학이 그리는 시장도 경제발전의 충분조건이 아닌 것은 물론 필요조건인지도 명확치 않은 실정이다. 자유시장경제론의 시각에서 박정희를 이해하기는 어려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2-3-2. 질문2: 선(先) 민주화가 경제발전을 가져온 경우가 있는가?
오늘날 민주주의는 하느님의 경지에 이르러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절대적 선이 되었다. 그래서 심지어 모든 경제문제에도 “민주”라는 접두어나 접미어가 최상의 인기 용어가 되고 있다. 경제발전에 있어서도 민주주의가 선결되어야 경제가 발전한다는 주장이 인기를 얻고 있다. 물론 이는 자유시장론과 결합하여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반대이다. 2차대전 이후 독립한 많은 나라들 중에 시장경제와 서구식 민주주의를 받아들여 경제적으로 성공한 나라가 몇이나 되는가? 감히 별로 없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으리라. 역으로 지난 세기 가시적 경제발전을 이룬 나라들이 진정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한 나라들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한국은 물론 중국, 싱가폴, 대만이 민주주의를 해서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2) 같은 관점에서 오늘날 선진화된 서구 선진국들이 19세기 도약과정이 오늘날 같은 민주질서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는가? 오늘날 서구 선진민주국가들의 경제는 본받을 만큼 역동적으로 잘 나가고 있는 것인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혹은 경제발전은 친구가 되기 어려워 보인다. 후꾸야마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역사발전의 끝이라했는데 아마도 크게 성급한 결론이 아닌가 싶다.3)
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나아가 경제발전은 친구가 되기 어려운가? 우선 이들의 원리가 서로 다르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을 그 원리로 하지만 후술하는 바와 같이 시장은 항상 결과의 불평등을 만들어냄으로써 동기부여를 통해 경제발전을 이끄는 장치이다. 시장경제는 경제적 불평등이 그 기본원리이다. 따라서 민주정치가 정치영역을 넘어, 즉 정치적 평등을 넘어 경제적 평등을 추구하게 되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나아가 경제발전은 같이 갈 수가 없게 된다. 오히려 민주정치가 경제발전의 장애 요인이 될 수 있는것이다. 이제 정치개혁보다 시장경제개혁을 먼저 한 중국이 이와 반대로 개혁을 한 러시아나 여타 동구권 체제전환국들보다 더 경제적으로 앞서가는 이유를 알 수 있으리라.
이제 정치학계, 정치경제학계, 정치계의 민주지상주의가 경제발전의 장애가 될 수 있음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박정희의 권위주의 정치가 어떻게 경제발전과 양립할 수 있었는지도 어느 정도 보일 것이다. 이들이 자신들의 도그마로 박정희를 혹은 경제발전 문제를 보는 것은 뭐라 할 수 없겠으나 민주화가 되어야 경제가 발전할 수 있다는 주장은 옳은 명제가 아님을 명심하면 좋을 것이다.
2-3-3. 질문3: 기업의 성장과 경제력의 집중 없이 경제가 발전하는 예가 존재 하는가?
자본주의 경제는 기업경제다. 자본주의 경제는 주식회사 기업제도의 혁신을 통해 진화해온 경제체제이다. 그리고 그 발전도 기업의 성장발전을 통해 견인되어 왔다. 오늘날 국가 간 일인당 소득의 순위와 포춘 500대, 1000대 일류기업의 보유 순위와 대기업 비중(경제력 집중)의 순위가 높은 상관관계를 보인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후술하는 바와 같이 기업의 성장 없이 경제발전은 없다. 성공하는 기업에의 경제력 집중 없이 성공한 경제가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혹자들은 대만을 반대예로 들겠지만 이는 적절한 예가 아니다. 4)
2-3-4. 질문4: 평등한 경제가 발전할 수 있는가?
시장에만 맡겨놓는다고 해서 경제가 발전한 예를 찾기가 어렵지만 또한 제대로 기능하는 시장이 없이 경제가 발전하기도 어렵다. 현실시장은 경제적 노력과 성과에 따라 보상을 차등함으로써, 즉 경제적 불평등을 〮무기로 모두를 열심히 움직이게 하는 동기부여장치이다. 노력과 그에 따른 성과와 관계없이 모두가 평등한 보상을 받는 사회가 경제발전을 일으킬 수 없음은 너무 자명하다. 이런 사회는 전 국민의 사보타지, 즉, 일 안하기 운동에 직면하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의 몰락이 바로 경제평등원리 때문이며,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은 바로 시장의 불평등 창출기능 때문인 것임을 이제 이해할 수 있으리라.
경제발전의 본래의 의미 자체가 모두 가난하고 평등한 농경사회가 점차 부자들이 생성되는 산업사회로 창발해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따라서 경제의 발전과정은 불균형발전이 기본이며 평등발전은 형용의 모순이다. 경제발전은 모두 발전하지만 같아질 수 없는 과정이다. 대중소기업 간, 지역 간 불균형이 반박정희 논거가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으리라.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볼 때 반박정희 논거는 논리적, 현실적 근거가 희박하다.
3. 새로운 경제발전 모델을 찾아
필자는 오랫동안 기존의 경제학이론이나 정치철학담론으로는 박정희성공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경제발전현상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가 어렵다고 주장해 왔다. 여기서는 아주 간략하게 새로운 경제발전이론을 설명하고자 한다.5)
경제발전은 “흥하는 문화유전자”의 복제·전파과정이다. 흥하는 이웃을 따라 경제성공과 발전의 노하우를 배워 흥하는 자로 변신하는 과정이다. 개인만이 아니라 문명, 경제, 나아가 기업의 발전과정이 다 이러하다. 위대한 성공선례를 무임승차하여 따라 배우는 과정이 발전의 과정이다. 따라서 흥하는 이웃을 넘치게 하는 사회는 발전하지만 흥하는 이웃을 청산하거나 폄하하는 사회는 경제정체를 못 면한다. 따라서 자본주의 경제발전관은 “흥하는 이웃이 있어야 나도 흥한다.”이다. 칼 마르크스는 “흥하는 이웃이 있어 내가 망한다.”고 했는데 이는 세상의 이치를 거꾸로 본 셈이다. 그러니 사회주의가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현실의 시장은 경제적 노력과 성과에 따라 보상을 차등함으로써, 즉 흥하고자 노력하여 성과를 내는 이웃에게 더 많은 보상을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생기는 경제적 불평등을 〮무기로 모두를 흥하는이웃이 되고자 열심히 노력하게 만드는 동기부여장치이다. 즉 시장에서 우리가 하는 일이란 바로 경제적으로 우리 구미에 맞는 재화와 서비스를 공급하는 기업과 개인들에게 더 많은 구매력(돈)으로 투표함으로써 우수한 경제주체들에게 경제력을 집중시킴과 동시에 이들 모두를 더 열심히 노력하게 유도하는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시장은 바로 경제적 불평등의 원천인 셈이다. 바로 이러한 “시장의 차별화기능”이 경제발전의 원동력이다. 따라서 경제발전 과정에서는 흥하는 이웃에게는 인기가 모이고 경제적 부가 모이기 마련이며, 결과적으로 경제발전은 불균형적 현상일 수밖에 없고, 강한 기업에의 경제력 집중과 개인과 지역발전의 차등은 발전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따라서 열심히 노력하여 성과를 내는 기업과 개인에게 경제력과 자원의 집중과 집적이 없이 발전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시장의 차별화노력만으로는 경제발전이 안되는 시장실패 문제가 발생한다. 문제는 시장이 경제발전의 성공노하우를 창출하는 흥하는 이웃들을 제대로 보상하려 하지만, 누가 이들에게 무임승차하는지에 대한 정보가 불완전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소위 거래비용이라는 정보탐색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결국 무임승차를 막지 못하여 흥하는 이웃에 대한 보상이 항상 미흡해진다는 말이다. 누가 무임승차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니 단속이 어려워지고 그러니 우리는 마음 놓고 남의 성공노하우를 무임승차하면서 사는 셈이 되는데, 무임승차가 많아지면 버스회사가 망하듯이 흥하는 이웃들은 생기지 않게 되고 경제발전은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훌륭한 부모와 형제, 스승, 국가인재들을 무임승차만하고 잘 대접하지 않으면 차후에 그런 훌륭한 분들은 잘 생기지 않는 법이다. 일등 문명, 일등 경제, 일류 기업들이 영원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기업이라는 장치가 등장하여 시장의 실패를 교정할 수 있다. 우수한 인재들을 뽑아 잘 대접하고 활용함으로써 흥하는 이웃들을 더 만들어내어 경제발전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기업들도 무임승차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흥하는기업은 다른모든 기업들의 무임승차 대상이 되어 점차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일류 기업들은 그래서 쉽게 잘 생겨나지 않는 것이다. 일등 기업이 영원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모든 무임승차 현상을 고치기 위해 정부의 역할이 필요해진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열심히 노력하여 경제에 기여하지만 무임승차 때문에 기여만큼 충분히 보상을 받지 못하는 흥하는 이웃들을 지원해야 한다는 말이다. 시장으로부터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하여 사라질 위험에 놓인 우수기업, 개인들이 각종의 경제제도를 통해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함으로써, 그래서 동기를 충분히 부여함으로써 경제발전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민주정치 하에서 정부의 지원정책이나 경제제도를 법제화하는 것은 의회이다. 따라서 정치권의 역할도 중요하다. 정치권이 시장의 차별화기능을 이해하고 국민들이 자신의 노력과 성과에 맞게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경제사회적 분위기와 제도를 만들어내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시장은 성과 있는 주체들을 우대하려하는데 정치권이나 정부가 나서서 우리는 그런 차별적 인센티브제도가 싫고 모든 국민들이 성과에 관계없이 다 좋은 보상을 받아 행복해지길 원한다고 국가제도를 그런 평등주의적 방향으로 만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시장의 차별화기능은 더 이상 작동할 수 없고 국민들은 동기부여가 사라져 너도나도 일안하기, 즉 사보타주(sabotage)에 몰입하고 경제는 정체의 길로 가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민주화된 많은 선진국이나 후진국이 겪고 있는 장기성장정체현상도 많은 경우 일인일표의 민주주의의 부작용인 인기영합주의 하에서 등장하는 경제평등주의정책 체제가 그 원인임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경제발전은 시장과, 기업, 정부, 정치가 모두 우수한 기업과 경제인, 근로자들을 무임승차를 보상하는 차원에서 차별적으로 더 대접하고 그 공을 인정함으로써 만 가능해진다. 무임승차당하는 만큼 사회가 보상하거나 배려하는 것이 경제발전의 필요조건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신상필벌의 원칙에 따라 스스로 돕는 경제주체들을 제대로 대접하는 국가만이 경제발전을 일으킬 수 있다. 역으로 시장은 성과에 따라 차별을 하려하는데 국가가 반대로 모두 평등하게 대접하게 되면 시장은 멈추고 경제도 멈추고 발전은 정지된다. 사회주의 경제의 몰락을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그래서 경제발전의 큰 원리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원리는, “'경제적 차별화’는 경제발전의 필요조건인 반면 '경제평등주의’는 경제정체의 충분조건이다.” 둘째로 정치의 중요성을 감안하면, “'정치의 경제화’는 경제발전의 필요조건인 반면 '경제의 정치화’는 경제정체의 충분조건이다.” 여기서 '경제적 차별화’는 경제적으로 다른 것을 다르게 취급하는 것을, '경제평등주의’는 경제적으로 다른 것을 같게 취급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정치의 경제화’는 정치적 고려를 배제한 경제적 차별화원리의 실천을, '경제의 정치화’는 정치적 고려 하에 경제적 차별화원리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4. 한국의 경제발전 역사
4-1. 개발연대 성공의 원인: 신상필벌의 경제차별화 정책
한국의 개발연대에는 신상필벌의 원칙에 따라 자조하여 흥하는 자를 우대함으로써 모두가 따라 배워 흥하는 자가 되어 온 나라에 흥하는 자가 넘쳐났던 역동적인 발전의 과정이었다. 물론 이에 따라 우수 기업과 지역에의 부와 경제력의 집중 및 부문간·지역 간 불균형을 만들어 내기도 한 것이다.
개발연대 성공을 가져온 정책들은 모두 자조하여 남보다 더 좋은 성과를 내는 경제주체들에게 더 많은 보상과 기회를 제공하는 신상필벌의 정책들이었다. 예를 들면 1) 수출 우수 기업만 지원한 수출 육성정책, 2) 수출성과 우수 기업만 지원한 중소기업육성정책, 3) 능력 있는 기업만 참여시킨 중화학공업 육성정책, 4) 성공하는 마을만 지원한 새마을 운동, 5) 잘하는 공장만 지원한 새마을 공장육성정책, 6) 성과 있는 원호대상자를 더 우대하는 정책 등을 들 수 있다.
한마디로 박정희 경제정책의 성공요인은 “스스로 돕는 자를 우대하는 인센티브가 차별화된 지원제도”를 구축함으로써 스스로 돕는 자를 양산하고, 이를 통해 흥하는 문화유전자인 “하면 된다”는 유전자를 퍼뜨림으로써 더욱 더 많은 흥하는 이웃들을 양산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하면 된다는 자조정신으로 남보다 더 노력하여 성공하는 국민들을 앞장세움으로써 게으르고 희망이 없다던 한국국민들을 모두 자조하는 국민들로 바꾸어 놓았다.
이를 통해 개발연대는 세계사에서 그 유래가 없는 최초의 초고속 성장과 가장 양호한 동반성장을 실현하였다. 수출 육성정책의 수혜자들인 수출기업들이 수출 수익을 국내에 재투자하도록 끝없이 유도, 독려함으로써 국내 중소기업, 서비스업의 수요를 창출하고 일자리를 창출함으로써 내수와 외수의 동반성장을 이끌었다.
4-2. 80년대 후반이후의 경제역동성하락요인: 경제평등주의 정책
<그림> 지난 60년 한국경제 발전사: 잠재성장률 추세
<그림>에 의하면 개발연대 연평균 8-9% 성장으로 30년간 한강의 기적을 이룬 한국경제는 1980년대 후반이후부터 잠재성장률이 지속 하락하여 오늘날 3%대로 추락하고 있다. 이런 성장 잠재력 둔화원인은 무엇일까? 1980년대 들어서면서 박정희 정책패러다임을 청산하는 작업이 진행되었음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바로 박정희 정책이 경제불균형을 초래했기 때문에 보다 평등하고 균형된 경제를 지향한다고 각종의 규제와 지원정책들을 양산하기 시작했다. 이런 새로운 정책 패러다임을 한마디로 부른다면 경제평등주의라 할 수 있다. 그 진수가 바로 1987년 민주헌법에 등장한 경제민주화이다.
지난 30여 년의 경제성장의 둔화와 경쟁력 저하의 원인은 경제 민주화한다고 흥하는 국민들을 폄하하는 경제사회제도를 만들어 내어 국민들의 자조와 발전정신을 약화시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 이후 남 탓하고 대기업, 부자, 수도권 탓하는 국민들이 양산 되고 이제 내 실패는 사회 탓이며 정부가 책임지라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더더욱 커지면서 정치는 지속적으로 표퓰리즘 민주정치로 전락해 왔다. 개발연대 자조정신으로 충만했던 국민들이 이제 남 탓, 정부 탓하는 국민들로 바뀐 것이다.
80년대 중․후반 이후 한국은 개발연대성공의 동력이었던 우수한 경제주체에게로의 경제적 자원의 집중과 집적을 유도해온 시장과 정부의 기능을 해체하고 경제적 평등과 실효성 없는 균형발전 등을 추구 해 왔는데 그 구체적 사례는 다음과 같다. 1) 대기업이 되면 무조건 규제하고 중소기업이면 성과에 관계없이 획일적으로 지원하여 모두 작은 중소기업으로 주저앉게 만드는 기업정책, 2) 가난한 농민만을 우대하여 농민을 가난한 농민으로 주저앉게 만드는 농업지원 정책, 3) 노조를 약자라고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키워온 경영민주화 정책, 4) 수도권을 역차별하는 수도권 규제와 획일적 지방육성 정책으로 전국의 하향평준화를 초래해온 국토균형발전 정책, 5) 획일적 지원정책으로 우수한 연구자와 학교를 역차별하여 연구수월성을 훼손해온 대학지원정책과 과학기술지원정책, 6) 우수학생역차별로 실력의 하향평준화를 초래하고 공교육 부실과 사교육의 발호를 조장함으로써 가난의 대물림을 고착시켜온 교육 평준화 정책 등을 들 수 있다.6)
1980년대 후반이후 한국의 경제정책 패러다임은 경제 수월성을 희생하면서 평등을, 즉 하향평준화를 지향해왔으며 이러한 정책 패러다임이 바로 오늘날 경제의 역동성 저하와 각종 양극화의 근본원인이라 할 수 있다. 특히 1980년대 이후에는 경제발전 정책이라 하지만 실제는 많은 경우 성과에 관계없이 획일적으로 지원하는 사회보조 정책으로 전락함으로써 경제발전 효과가 사라지고 사실상의 경제적 차별화를 통한 동기부여 정책으로서의 경제정책은 실종되게 되었다. 경제역동성의 하락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한편 수출제조 대기업들이 각종 국내 규제 때문에 수출수익을 국내투자로 환원하지 않음으로써 수출과 내수 간의 연계가 사라져 각종의 양극화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오늘날 국내 대기업 투자규제 정책은 투자할 능력이 있는 기업들의 국내투자를 막아 해외투자에 나서게 조장함으로써 일자리를 해외에 수출하는 양극화조장 정책으로 전락하였다.
5. 개발연대의 몇 가지 난제에 대한 재해석
이제 새로운 경제발전관으로 개발연대에 대한 잘못되었거나 미흡한 해석을 바로 잡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5-1. 정치와 경제: 어떻게 유신 등 권위주의정치 하에서 경제발전이 가능했나?
오늘날 민주정치는 경제적 평등을 추구하는 표퓰리즘 정치로 변질되고 있다. 선후진국을 불문하고 사회민주주의가 보편화되고 있음에 주목해야한다. 이는 민주주의 성격상 불가피한 측면이다. 표에 의해 경제정책이 결정되는 의회 우위의 정책결정체제는 불가피하게 평등주의 경제정책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경제적 수월성을 추구하는 경제발전 정책의 설 땅은 그만큼 좁아지게 된다. 결국 경제적 불평등을 용인할 수 있는 자유시장 민주주의는 경제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으나 경제적 평등을 추구하는 평등민주주의 혹은 포퓰리즘 민주주의는 발전에 장애가 된다.
박정희의 권위적 정치가 경제발전과 양립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표퓰리즘 민주정치를 사전에 차단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오늘날의 한국정치 상황이 개발연대를 덮었다면 경제적 차별화정책을 시행할 수 있었을까 상상해 보라. 그래서 개발연대는 정치를 경제화, 즉 정치의 경제에 대한 영향을 차단함으로써 민주정치의 부작용을 최소화하여 인센티브를 차별화하는 경제정책을 실행할 수 있었던 반면 그후 지난 30여 년간은 역으로 경제가 정치화됨으로써 경제정책은 실종되고 모든 정부의 지원정책이 1/n로 나누는 평등주의 사회정책으로 변질되게 된 것이다. 정치학계나 정치계가 민주주의라는 잣대로 박정희의 쿠데타나 유신을 부정적 시각에서 볼 수는 있겠지만 반면에 이를 통해 지속가능한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었을 가능성도 같이 보는 균형된 시각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지만 민주주의는 하느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5-2. 관치(官治) 부자유(不自由) 속의 발전은 어떻게 해석할까?
박정희 시대의 성공은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아킬레스건이다. 관치 부자유속에서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발전이 반드시 경제적 자유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정부의 경제적 차별화전략이 가미되어야 한다는명제를 수용한다면, 경제발전은 자유 그 자체보다도 자유경쟁을 통해 경제적 차등과 불평등을 초래하는 시장의 차별화 압력이 더 직접적인 동인이 된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경제적 자유는 경제적 불평등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경제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것이다. 그래서 경제발전의 원동력은 자유도 중요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차별과 차등의 압력이라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소위 경제적 자유를 허용해 놓고도 결과의 차등과 차이를 용인하지 않는 사회는 사회주의와 다르지 않게 된다는 점을 명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5-3. 재벌은 친대기업정책이 아니라 친중소기업육성정책의 성공결과이다
친 박정희든 반 박정희든 박정희정책을 재벌중심의 경제정책이었다고 하는데 이의를 달지 않고 있으나 이는 경제실상을 잘 모른 해석이다. 박정희 정책은 중소기업 육성정책을 성공적으로 하여 경쟁력 있는 대기업의 출현을 유도하였다고 봐야 옳다. 1940-50년대 중소중견 기업들을 20년 만에 세계적인 대기업들로 육성한 중소기업육성정책의 성공이 박정희 패러다임의 진수임을 이해 할 수 있어야 한다.7) 시장성과를 통해 능력이 인정된 성장하는 중소기업을 조세, 금융, 외환 정책 등을 통해 우대하고 이 들에게 실패하는 중소기업을 인수하도록 허용함으로써, 빠른 속도로 중소기업의 대기업으로의 성장을 유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 30년은 획일적 지원정책으로 인해 오히려 못하는 중소기업이 상대적으로 더 대접받음으로써 성장유인이 사라져 경쟁력 없는 중소기업천국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5-4. 중화학 공업화 전략은 실패한 정책인가?
박정희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도 자유시장 경제론자들에겐 아킬레스건이다. 성공하기 어렵다고 배운 정책이 성공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미 1980년대에 한국정부와 세계은행은 공식적으로 박정희 중화학공업화정책은 실패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경제는 그 실패했다는 중화학공업이 이끌어 가고 있으니 이 역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일부 자유시장론자들은 애써 이 성공을 무시하거나 혹은 폄하하기에 바쁘고, 인정한다는 좌파는 그 성공의 원인을 모른다.
우리의 새로운 경제발전관으로 보면 산업정책은 경제적 차별화정책으로 접근해야 성공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실패하는 기업들 보다 성공하는 기업들에게 더 많은 자원이용기회를 열어주는 경제적 차별화원리에 따른 관치 산업정책은 그 성공가능성이 높다. 개발연대 중화학공업화전략은 수출을 통해 투자자금을 확보한, 다시 말해 기업경영능력과 성공경험이 있는 기업들만이 참여할 수 있었고 이것이 실패가능성을 최소화했으며, 나아가 성공을 가져온 것이다.
5-5. 산업과 지역의 불균형적 발전이 집적과 집중의 수확체증효과를 통해 산업성장과 도시발전을 유도하였다.
집적과 집중은 수확체증현상의 원천이다. 산업의 집적과 집중이 외부효과와 시너지 효과를 통해 지역의 발전, 도시의 발전을 가져온다. 평등하고 균형되게 분산된 산업과 지역경제 분포는 경제도약의 동력을 추동하기 어렵다. 입지조건이 유리한 지역부터 시동을 걸어 점차 그 외부효과와 스필오버, 혹은 적하효과(trickle-down effect) 등을 통해 발전의 시너지가 퍼져나가는 과정이 발전의 과정이지 평등한 투자와 개발이 발전을 가져오는 예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력집중과 지역불균형을 청산하여 경제평등을 추구하는 균형발전이나 경제민주화 정책들은 발전에 장애가 될 수밖에 없다.
6. 박정희의 성공 리더십과 원리, 그리고 오늘에의 교훈.
박정희 리더십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논쟁거리가 될 수 있는 “정치의 경제화”와 “경제의 정치화”, 어느 패러다임이 경제발전을 가져 올까? 하는 질문에 대한 입장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 속성과 경제발전의 원리에 대한 우리의 견해와 그동안의 한국을 포함한 세계경제발전사에 따르면 정치를 경제화하는 나라만이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뤘으며, 그러나 그 예 또한 많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를 위해 독재나 권위주의정치에 반드시 의존해야한다거나 혹은 서구 민주주의에 의존해야 좋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으나 정답은 없어 보인다. 후진국들 중 독재정치 하에서도 성공한 예가 희귀한 것과 마찬가지로 서구식 민주주의 하에서 정치의 경제화를 이루기 또한 그리 쉽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대에는 영국의 대처수상이 전형적인 정치를 경제화한 리더십으로서 3류 국가로 전락하는 영국경제를 살려내었다. 등소평, 이광요 등이 박정희에 가까운 리더십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박정희 정치적 공과는 정치가나 정치학자들의 판단영역이지만 국민경제발전의 측면에서 볼 때 박정희의 선택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박정희의 리더십은 경제민주화를 배격하고 정치를 경제의 수단화함으로써 철저하게 성과에 기초하여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운 하나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인류역사상 거의 최초의 최고속8) 동반성장의 경제적 도약을 이룬 희귀한 경제적 차별화 리더십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즉, 신상필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메시지와 정책으로 흥하는 국민들을 우대함으로써 모두가 흥하는 대열에 참여케 하고 결과적으로 흥하는 이웃들을 양산하는데 성공한 경제적 차별화 리더십이라 할 수 있다.
정치적 독재도, 정부주도도, 기업육성도, 수출육성도, 중화학공업 육성도, 새마을 육성도 모두가 “독특한 박정희 차별화 리더십” 때문에 성공에 기여할 수 있었지 이러한 박정희 리더십이 없었다면 정치적 독재를 해도, 정부주도로 해도, 기업을 육성한다, 수출을 육성한다, 중화학공업을 육성한다, 새마을을 육성한다 해도, 모두 평등주의로 빠져 성공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이 우리의 발견이며 역사의 경험이다.
마지막으로 박정희 성공의 진수를 오늘날의 경제문제들과 연관해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차원에서 다시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선 박정희 경제성공은 동반성장과 행복경제의 모범이었다. 성과에 따른 차별적 대우로 모두를 발전의 길로 유도함으로써 동반 성장을 이끌었다. 너도나도 앞선 자의 성공노하우를 따라 배워 스스로 돕는 자로 변신하여 흥하는 이웃이 되었다. 수출성공기업을 적극 지원하고 이들의 국내투자를 적극 유도함으로써 외수·〮내수, 대기업·중소기업, 제조업·서비스업을 동반 성장시키고 지속적으로 국내 일자리를 창출함으로써 모든 국민의 행복시대를 열었다.
둘째로, 세계최고의 창조경제를 이룩했다. 1950-60년대 마차를 굴리던 농업경제를 1980년대 자동차를 타는 첨단산업국가로 변신시킨 창조경제의 모범이었다.
셋째, 세계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중소기업을 대기업으로 육성한 중소기업육성전략의 모범이었다.
지막으로 이 모든 놀라운 경제변화를 “시장의 차별화기능에 따라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신상필벌의 리더십”으로 달성하였다.
오늘날 한국경제가 안고 있는 여러 난제들을 풀고 싶다면 바로 박정희 성공원리를 다시 되새겨 교훈을 찾는 일부터 해야 할 것이다. 박정희 청산이아니라 재발견을 통해 많은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박정희의 성공원리는 오늘날 저개발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대부분의 표퓰리즘 혹은 사민주의하의 개발도상국들은 물론 장기 저성장의 늪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서구 선진 사민주의 국가들에게도 큰 교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박정희 성공원리를 통해, 흥하는 이웃을 청산하거나 희생시켜 모두 경제적으로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려는 표퓰리즘 민주주의나 사회민주주의가 바로 그 동안 “경제의 정치화”를 통해 경제평등주의 정책체제를 공고히 함으로써 “경제적 차별화 발전원리”에 역행해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또한 저개발과 장기성장정체를 벗어나는 길이야 말로 바로 “경제적 차별화원리”의 회복에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1) 2009년 2월, 박정희대통령 기념관 바르게 짓기 시민공청회 발표(PPT)자료를 보완, 확대한 것임.
2) 반론으로 홍콩을 거론할지 모르나 이는 영국의 복제품에 불과하여 후진국 경제개발 모델이 되기는 어렵다.
3)후꾸야마는 수년전 “역사의 종언”이라는 책을 통해 인류역사의 발전은 이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의 승리를 끝으로 이념과 체제경쟁이 종식되었다고 주장하였다. 허지만 아직도 시장경제는 물론 민주주의는 서로 충돌하면서 진화하고 있는 중이다.
4)대만은 개발 초기 본토로부터 이주한 국민당정부가 민간대기업의 독점방지와 경제적 평등을 주창한 손문의 민생경제를 실현한다고 대규모 중화학공업과 소위 민생산업 등, 기간산업을 국영화하면서, 민간자본은 노동집약적 중소기업부문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이들 중소기업들이 초기에는 과거 점령국인 일본의, 그리고 나중에는 점차 미국 등 선진국 기업의 하청기업으로 특화하게 되었다. 특히 여기에는 정치적으로 안정적인 대만통치를 위해 현지민간대기업의 출연을 환영하지 않았던 국민당 정부의 이념과도 관계가 없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대만의 중소기업 중심의 기업생태계는 일종의 인위적 결과로서 경제도약의 견인차 역할을 지속하기가 어려웠으며, 80년대 이후 경제성장의 정체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현지인 집권세력이 등장하여 민간 대기업 성장을 장려하면서 90년대 이후에는 ICT 산업을 중심으로 대기업들이 크게 신장되어, 대만의 GDP 대비 10대 제조대기업의 매출액은 2000년 14.5%에서 2011년 71.3%로 급증하고 있다.
5)새 이론의 보다 상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이 글의 말미에 열거한 필자의 저술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6)우수학생역차별하는 평등주의교육으로 공교육이 무너져 사교육시장이 발호하게 되면 가난한 학생은 더 이상 좋은 교육기회를 가질 수 없어 개천에서 용나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날 수 없게 된다.
7) 1940-50년대, 삼성상회, 현대자동차공업사와 현대토건사, 럭키치약, 선경직물, 두산상회, 한진상사, 60년대 대우오퍼상 등의 중소중견기업들이 오늘날 각각, 삼성그룹, 현대자동차와 중공업과 현대건설 등 범 현대그룹, LG그룹, SK그룹, 두산그룹, 한진그룹, 대우그룹(해체) 등의 대기업들로 성장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8) 최고속성장의 기록은 최근 중국에 의해 깨지고 말았다. 그러나 최초의 최고속 기록은 영원히 우리의 기록이다.
참고문헌
좌승희(2006) 신국부론, 굿인포메이션
-------(2012), 발전경제학의 새 패러다임-진화를 넘어 차별화로, 율곡
------(2012), 경제발전의 철학적 기초, 서울대 출판문화원
Jwa, Sung-Hee(2014), A General Theory of Economic Development: A Holy Trinity of Economic Development, Market, Corporation and Government under Politics, a working draft for publication.
좌승희 / KDI 국제정책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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