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거짓을 믿을 것인가, 진정한 자유를 얻을 것인가: <노예의 길>

최하늘 / 2021-02-05 / 조회: 1,715

“우리가 우리의 식사를 기대하는 것은 푸줏간·술집·빵집의 자비심에서가 아니고, 그들 자신의 이익에 대한 그들의 고려에서 기대하는 것이다.”


이처럼 인류를 풍요롭게 하는 것은 도덕이 아닌 개인의 합리적 이익 추구라는 사실을 천명한 애덤 스미스(Adam Smith) 이후로, 개인의 자유로운 참여를 근간으로 하는 시장경제는 인류사회에 눈부신 발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18, 19세기에는 최소한의 법적인 보호도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기에 노동자들의 처우와 같은 여러 문제들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문제들을 겪으며, 많은 이들은 강한 힘을 가진 ‘정의로운’ 정부를 수립한다면 그러한 문제들을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한 생각은 곧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전체주의로 이어졌다. 그것은 정부가 국민을 위해 최선을 다할 거라는 희망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그러나 그 헛된 희망은 이탈리아를 파시스트의 소굴로 만들었고, 독일의 국민들을 역사의 영원한 죄인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20세기의 전반부라는 끔찍한 시대를 거치면서, 전 세계는 개인들의 자유를 침해하는 힘을 가진 국가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깨달았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의 <노예의 길>이 출간된 시기는 그러한 전체주의의 악행이 세계를 집어삼키고 있던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다. 이 책에서 하이에크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전체주의의 심각한 문제를 지적하는 동시에, 더 나아가 그 당시에는 전체주의 진영과 대립하고 있던 사회주의가 사실 전체주의와 동일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즉, 사회주의 또한 강력한 권력을 가진 정부가 그 힘으로 ‘선’과 ‘효율성’을 행할 거라는 분홍빛의 희망에 기초하여 개인들의 자유를 그 대가로 반납한다는 것이다. 


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 사회주의를 표방하던 소련과 전체주의 진영이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었고, 동시에 서구 사회의 여러 지식인들 또한 사회주의를 하나의 유력한 사회모델로서 생각하고 있던 시대였음을 고려해보면, 하이에크의 경고가 얼마나 통찰력 있는 것이었는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지난 50여 년의 역사는 하이에크가 옳았음을 입증해주었다. 소련이라는 거대한 사회주의 실험은 수많은 이들의 고통과 죽음을 남기고 실패하고 말았고, 한반도의 두 체제는 사회주의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를 가진 체제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예의 길>에서 하이에크가 주장하고 있는 것은 비단 사회주의 비판뿐만이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이 핵심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희생함으로써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일련의 생각들 전체이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통찰이야말로, 사회의 모든 이들이 필수적으로 공유해야 하는 통찰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가 비판하고 있는 생각들은 아주 매력적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악행을 방지하는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라고 모두가 행복하고 풍요롭게 살아가기를 원하는데, 개인들이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을 정부가 대신 해주겠다는 속삭임은 매우 달콤하기 때문이다. 물론 앞서 말했듯이 여러 역사적 교훈들은 그런 믿음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보여주지만, 많은 이들은 언제나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들은 나치즘과 같은 사상에 동조할 리는 없다고 생각하고, 민주적 선거를 통해 그런 ‘선한’ 자신들이 직접 정치인들을 뽑기 때문에 부작용을 통제할 수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정부가 주도하여 세운 계획이 여러 개인적인 변수를 차단하여 궁극적으로 효율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기적인 부자들의 이익 추구보다는, 자신들의 손으로 구성한 정부가 약자들을 고려하여 시장을 통제하는 것이 더 ‘선하고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이에크는 이 책 전반에서 그러한 믿음은 허황된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또 지적한다. 즉, 그는 국민들이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정의롭다, 우리는 유능하다’와 같은 정부의 말을 그 무엇보다 경계해야 함을 강조한다. 물론 국민들은 정부가 정의를 실현할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정부에게 자신들을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을 부여할 것이다. 그러나 믿음은 정의를 보장하지 않는다. 액턴 경(John Dalberg-Acton, Lord Acton)의 말처럼, “모든 권력은 부패”하기 때문이다. 그 권력의 억압이 자신들을 향하고 있음을 국민들이 알아챌 즈음에는 이미 개인의 자유는 온데간데없고 오직 노예들만이 상실한 자유를 그리워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민주주의의 탈을 쓴 자유의 통제 역시 그와 유사한, 혹은 더 심각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역설한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라는 강력한 이름 아래에서는 개인의 자유를 통제하는 정부의 권력도 정당화된다고 오해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부가 그들의 자유를 조금씩 갉아먹어도 그것이 민주주의의 정당한 결과일 뿐이라고 무덤덤하게 받아들인다. 하이에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엄중하게 경고한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수단으로 작용하지 않는 한, 민주주의는 전체주의체제 아래에서도 지속될 수 있다.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아마도 그 어떤 독재정치 못지않게 철저하게 개인의 자유를 파괴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의 말대로 자유라는 가치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주인이 스스로 자신의 자유를 빼앗는 것은 모순이기에, 그 둘의 위치는 결코 바뀔 수 없다. 


나는 그의 이러한 주장들이 얼핏 너무 당연해서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 같으면서도, 인류의 역사에서 언제나 어겨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변수를 제거하는 계획된 통제라는 쉬운 길이 있다는 유혹은 너무 매력적이어서, 언제나 사람들은 쉽게 과거를 잊고, 혹은 자신의 능력과 선함을 과신하고 그 길을 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말까지 도달하는 기간만이 달랐을 뿐, 그 결말은 항상 자유의 상실이었다. 따라서 나는 이념과 사상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달콤한 유혹을 거부하라는 하이에크의 경고를 머릿속에 새기고 또 새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주장은 역사적으로도 타당하고,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사회 정의를 실현하고 효율적인 경제 계획을 세우겠다는 정부의 주장은, 설령 그들이 선의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어떤 이들의 자유를 동의 없이 통제하기에 부당하기 때문이다. 또한 경쟁을 위축시키는 정부의 개입은 시장의 왜곡을 발생시켜 효율적인 성과를 내지도 못할뿐더러, 비대해진 권력은 그 내부의 부패와 타락으로 이어진다. 즉, 정부의 권력이 선하고 유능할 거라는 믿음은, 오히려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그러면서도 목표를 달성할 수 없으며, 심지어는 자유를 상실한 노예 상태라는 심각한 퇴행으로 나아가는 결과를 낳을 위험이 매우 높다. 


이는 칼 포퍼(Karl Poppe)가 그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유토피아적 사회공학을 거부하는 입장과도 일맥상통한다. 포퍼는 강한 권력이 사회 문제를 더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에 반발하며, 그러한 유토피아적 발상은 오히려 자유의 상실을 통해 사회의 개인들을 끔찍한 고통으로 이끌 것이라고 말한다. 비록 그가 하이에크의 자유주의적 입장에 모두 찬성하지는 않겠지만, 거대 권력의 정부가 사회를 더 좋은 곳으로 이끌어간다는 명목하에,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큰 위험이 있음을 신랄하게 비판한다는 점에서 두 거장은 동일한 시선을 공유하고 있다.


물론 개인이 할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공권력을 통해 범죄행위를 통제하고, 국가를 방어하는 등의 행위는 주권자들에게 어느 정도의 권력을 부여받은 정부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이다. 그러나 이때 자유를 침해하는 사회 중심적 계획을 부정하는 것을, 정부의 필요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호도해서는 안 된다. 국방·치안 등은 ‘경쟁을 위한’ 제도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하이에크는 ‘경쟁을 위한 계획’과 ‘경쟁에 반하는 계획’을 엄밀하게 구분한다. 그가 거부하는 것은 오로지 후자이며, 오히려 경쟁을 보다 효과적으로 만들어주는 계획에 대해서 그는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그 둘을 분명하게 구분해야 하며, 그럼으로써 하이에크가 사회 중심적 계획을 부정하는 것을 모든 계획을 부정하는 것으로 몰아가는 이분법적인 매도와 선동을 거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노예의 길>에서 하이에크가 주장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의 본질까지 침해할 위험이 있는 권력을 정부에게 부여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가 일견 당연해 보이는 그 사실을 계속하여 강조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권력이 집중된 국가가 사회 문제를 쉽게 해결할 것이라는 달콤함에 속아 넘어가기 쉽기 때문이다. 자유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제1의 것이기에, 이러한 위험은 이념과 성향에 관계없이 모든 사회의 구성원들이 명심해야 하는 종류의 위험이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국가에서는 지금도 국민들이 자신의 자유가 권력에 의해 과도하게 통제되는 것을 오히려 옹호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하이에크가 경고한 내용들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지난 몇 년간 우리나라에서는 분양가 상한제나 이익 공유제와 같은, 개인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시장을 왜곡하는 많은 정책들이 논의되고 시행되었다. 그리고 정치권은 이러한 정책들을 정의의 실현으로 포장하며, 그에 반대하는 이들을 피도 눈물도 없는 이기적인 악인으로 매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정치권은 민주적 통제는 무조건 옳다고 주장하면서, 하이에크가 자유사회의 위대한 원칙이라고 말하는 ‘법의 지배’를 무시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중이다. 끝으로 권력자들의 부패까지 수면 위로 드러나며, 하이에크가 이 책에서 지적한 과도한 권력의 부작용이 정말 말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그 양상이 너무도 유사하여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나는 그의 통찰력에 온몸에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현재를 살아가는 나에게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너무도 아프게 다가왔다. 앞서 말했듯, 하이에크는 정부가 말하는 정의의 실현이라는 달콤함이 우리를 노예의 길로 이끌 거라고 역설한다. 만약 우리가 그 달콤한 말들이 가져올 미래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지 못한다면, 우리는 사상과 이념에 상관없이 모두 노예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이것은 이익 다툼이 아니고, 이념 다툼도 아니다. 이것은 오직 인간의 더 나은 상태를 위한 노력일 뿐이다. 하이에크가 액턴 경의 말을 빌려 주장하듯이, “자유는 그 자체로 가장 높은 정치적 이상”이기 때문이다. 자유의 가치가 위태로워진 지금의 상황에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하이에크의 엄중한 경고를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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