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건국이후 미국 주도의 경제원조(1948~1960년)

권오중 / 2018-10-04 / 조회: 22,313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독일이 항복한 이후 개최되었던 포츠담 회담은 전후 국제질서를 결정하는 자리였다. 여기서 UN을 매개로 미국이 국제질서에서 주도권을 차지하려 했던 루스벨트 대통령의 구상은 사실상 좌절되고 말았다. 그 이유는 소련이 점령했던 동유럽 지역에 대한 기득권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결국 루스벨트의 사후 대통령 직을 승계했던 트루먼은 포츠담에서의 스탈린의 태도로 인하여 미국의 세계전략을 수정하기에 이르렀는데, 그것은 바로 '봉쇄정책’(Containment Policy)으로 구현되었다. 1947년 3월 12일 '트루먼 독트린’을 통해 발표되었던 봉쇄정책은 공산주의의 팽창 전략을 방어하는 차원에서 수립된 정책이었고, 이를 뒷받침하는 경제적인 보완재가 1947년 6월 5일에 발표되었던 '마샬플랜’이었다.


마샬플랜은 '유럽복구계획’(European Recovery Program, ERP)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유럽의 모든 국가들에게 미국이 원조를 제안하는 형식이었다. 그리고 이를 수용하는 국가들은 자연스럽게 친 서방에 편입되는 것이었고, 거부하는 국가들은 소련의 정치적 영향권에 들어가는 것이므로, 마샬플랜은 결국 유럽에서 자유민주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을 구분하는 역할을 했다. 실제로 소련의 점령지역의 국가들은 ERP를 수용하고 싶어도 수용할 수 없었고, 이 지역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은 오히려 더욱 강화되었다.


마샬플랜을 실행했던 기구는 '경제협조기구’(Economic Cooperation Administration, ECA)라고 하는 미국의 대외 원조기구였다. 그런데 이 기구는 단지 유럽의 복구에만 국한하지 않고, 공산주의 확산에 위협이 되는 모든 지역에 원조를 제공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대한민국에 대한 경제원조였다.


대한민국에 대한 미국의 경제원조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후인 1948년 12월 10일에 맺은 한미 조약에 의해 시작되었다. ECA는 우선적으로 대한민국에게 시급하게 필요했던 석탄, 석유, 곡물, 자동차, 기계류, 섬유 등을 직접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ECA는 1) 석탄과 전기생산, 2) 농업생산, 3) 수산업 생산, 4) 광산업 생산, 5) 교통과 통신시설 확충, 6) 섬유산업, 7) 기술교육, 8) 일본이 남긴 군수산업을 일반산업으로 전환 등 8가지 분야의 육성에 대한 원조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ECA의 계획은 초기에는 예정대로 진행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트루먼 정부가 제출한 1억 5천만 달러의 대한(對韓) 원조 예산안을 공화당이 장악한 미국의 의회가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49년 10월 1일 중국의 공산화이후 미국 공화당의 태도가 바뀌었고, 미국 의회는 공산주의의 팽창을 막기 위해 1950년 2월 15일에 당초 예산안의 1/3수준인 6천만 달러의 대한 원조를 승인했다. 이와는 별도의 다른 부분의 예산에서 지원된 원조예산까지 포함하면 1950년도의 원조예산은 총 1억 4천만 달러였다.


6.25전쟁의 발발로 ECA의 원조계획의 실천은 잠정 중단되었었지만, 종전이후 더 정확하게는 1954년 제네바 한국평화회담(1954.4.26.~6.15)의 결렬이후 미국은 막대한 규모의 대한(對韓) 원조를 계획했다. 이 시기에 미국은 미군을 통한 식량조달과 더불어 1950년 12월 1일 창설된 '유엔한국재건단’(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 UNKRA)라는 새로운 기구를 전면에 내세웠다. 6.25 전쟁이전에는 미국이 단독으로 대한 원조를 계획했지만, 전쟁이 발발하자 대한 원조에 UN을 끌어들였다. 물론 1954년 계획된 UNKRA의 대한 원조예산 1억 4천만 달러의 대부분을 미국(8천 5백만 달러)이 부담하기로 했지만, 미국은 UN의 대한(對韓) 원조는 공산주의와의 체제 경쟁에서 정당성에 대한 명분을 얻을 수 있었다.


1954년 6월 13일 UNKRA는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을 위한 5개년 계획을 제시했다. 그러나 1960년 8월까지 UNKRA에 참여했던 40개국들이 단지 1천 5백만 달러만을 조달했기 때문에 UNKRA의 대한 원조는 계획대로 진행될 수 없었다. 이 중에 미국이 부담했던 금액은 930만 달러였다. 그리고 UNKRA가 집행했던 금액도 거의 모두 식량, 의류, 운송 등 대한민국 국민의 당장의 생활수준 개선을 위해 사용되었다. UNKRA는 사실상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에 직접적으로 기여한 바는 없지만, 대한민국을 UN이 지지하고 후원한다는 명분을 제공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었다.


UNKRA와는 별개로 미국은 ECA의 후신으로 1953년에 만들어진 '대외활동본부’(Foreign Operation Administration, FOA)를 통해서 대한 경제원조를 지속했다. FOA는 1953년 7월 1일부터 1955년 6월 30일까지 2년 동안 총 14억 달러를 대한민국에 원조했는데, 이중에 5억 6천만 달러가 경제원조이고, 8억 4천만 달러는 군사원조였다. 경제원조는 주로 생필품과 경공업 기계류 등을 구입하는데 사용되었다. 1955년 하반기 부터는 '국제협조처’(International Cooperation Administration, ICA)가 FOA의 대한 원조업무를 인계받았고, 1955년 하반기에 2억 8천만 달러를 집행하였다. ICA는 1961년 11월 대외 원조업무를 담당하는 '국제개발기구’(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AID)가 설립될 때까지 대한 원조업무를 담당하였다.


1955~1960년까지 미국의 원조도 역시 대부분 군사적 분야와 완제품 수입 등에 사용되어졌으며, 실제로 대한민국의 경제 개발을 위한 산업시설 구축이나 인프라 확충에는 거의 사용되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미국이 지구상 최빈국으로 전락한 대한민국을 공산주의와의 체제경쟁에서 지켜내기 위해 원조의 많은 부분을 우선 대한민국의 안보를 유지하기 위한 군사비용에 사용했고, 그 외에는 대한민국 국민의 의식주 생활 개선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은 대한(對韓) 원조에 있어서 중장기적인 경제개발에 관심을 갖지 않았었다. 그리고 두 번째, 국제사회에서 부패한 국가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미국 외에 다른 국가로 부터는 전혀 개별적인 경제원조를 받을 수 없었다. 또한 1950년대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 “Buy American" 정책으로 말미암아, 미국의 원조를 가지고 다른 국가들과 교역을 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에서 통상교역적 측면에서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승만 정권은 미국의 원조 정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독자적이고 중장기적인 경제개발 계획을 세울 수 없었다.


1945년 해방이후 1960년 4.19까지 미국의 대한(對韓) 원조 총 금액은 약 28억 달러였다. 미국이 제공했던 막대한 금액의 원조는 대한민국의 안보를 유지하는 것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을 위한 기반 구축으로 연결되지 못한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


권오중 외교국방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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