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조약과 제네바 한국평화회담

권오중 / 2018-11-29 / 조회: 154

1951년 6월 23일에 UN 주재 소련대사 말리크(J.A. Malik)가 한반도에서의 전쟁에 대한 휴전을 제안한 이후 2년여의 지루한 협상 끝에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유엔군과 공산진영(중국과 북한) 사이에 휴전조약이 체결되었다. 말리크의 휴전제안은 서방진영과 일본과의 평화조약(1951년 9월 8일)을 저지시키려는 의도였지만, 이는 미국에게 거부되었다. 하지만 지루한 전쟁의 지속은 미국의 국내 여론을 악화시켰고, 전쟁의 종결을 공약한 공화당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취임(1953년 1월)과 스탈린 사망 (1953년 3월)은 자연스럽게 공산진영과 자유진영 간의 휴전 분위기를 고조시켰고, 또한 대미 강경자세를 견지했던 전쟁의 당사국 중국도 더 이상의 전쟁 지속의 무의미함을 수용하여 극적으로 휴전협상이 타결될 수 있었다.


휴전은 양 진영이 동의한 몇 가지 조건을 통해 성사되었다. 이 중에서 분단이라는 한국의 “현상”(Status quo)과 직접 관련 되었던 것이 “중립국 감시위원회”(스위스, 스웨덴, 폴란드, 체코) 구성과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한국평화회담” 개최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을 거부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이 한국(분단)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해서 무력통일을 고집하며 휴전조약에 서명을 끝내 거부했다. (이로 인하여 휴전체제라는 한반도의 국제질서에서 대한민국은 현재까지도 국제법적 권리를 갖지 못했다.) 이승만은 휴전조약 체결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북한에 대한 군사적 도발을 위협하면서, 휴전조약에 의거하여 조약 발효 3개월 후인 1953년 10월 28일, 또는 늦어도 1954년 1월 25일까지 평화회담이 열리지 못한다면 전쟁을 재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평화회담개최를 위한 UN(미국)과 공산진영(중국과 북한) 간의 준비 협상은 1953년 8월 7일에 판문점에서 시작되었고, 동시에 제7차 UN 총회(1953년 8월 17일~27일) 에서도 중점적으로 논의되었다. 여기서 UN 참전 16개국과 대한민국, 중국, 북한이라는 전쟁의 당사국 외의 소련과 인도, 폴란드, 체코, 멕시코, 버마(미얀마) 등 추가 참가국 선정문제와 더불어 회담이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이 서로 적국의 입장에서 회담을 해야 한다는 “across-the-table" 방식이냐, 아니면 모두가 같은 입장에서 처리하자는 ”round-table" 방식이냐를 가지고 양 진영 간에 이견이 있었지만, 결국 UN 총회는 미국이 제출한 참가국들 (UN 16개국, 대한민국, 북한, 중국, 소련) 안을 1953년 8월 28일에 의결하였고, 회담장소는 제네바로 결정되었다.


한국평화회담 개최가 결정된 이후 대한민국의 이승만 정부는 이 회담을 이승만 정부의 의도대로 이끌어 가려는 노력을 했다. 당시 변영태 외무부 장관은 회담 참가를 전제로 1) 제네바 회담이 인도차이나 문제와 함께 일괄 처리되지 않고, 한국문제에 국한할 것, 2) 회담은 “across-the-table"의 원칙이어야 할 것, 3) 회담 개최 3개월 내에 합의를 도출하지 못할 경우, 회담을 결렬시킬 것 등의 3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반면에 미국은 1) 1955년 3월 31일까지 한반도에 주둔한 모든 외국군 철수, 2) 국제적인 감시 하에서의 전 한국 총선거 (1955년 5월 1일), 3) 통일한국정부 구성 전까지 두 개의 정부 존속, 4) 제제바 평화회담에 참여한 국가들의 통일 보증, 5) 강대국들의 동의에 의거한 재 통일, 6) 재 통일된 한국정부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정이라는 6단계 로드맵을 제시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러한 미국의 구상이 전혀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여겼고, 대신 북한에서의 중국군 철수라는 조건을 최우선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자유선거도 북한에서 중국군이 철수해야 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렇듯 이승만 정부와 미국 정부도 회담의 내용에 있어서 근본적인 입장 차이를 나타냈다.


우여곡절 끝에 개최된 제네바 한국평화회담(1954년 4월 26일~6월 15일)에서도 이승만 정부와 미국 정부 간의 이견 차이는 지속되었다. 한편 북한 대표 남일은 UN의 선거 감독을 거부한 전 한국 총선거와 총선 전 모든 외국군 철수 그리고 전 한국 총선거를 위한 남-북한의 위원회 구성을 요구했다. 더군다나 중국과 북한은 휴전 조약이라는 국제법적 조건을 무시한 채, “한국문제는 한국인들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라는 (이는 현재 “우리민족끼리”라는 북한의 주장과 동일함) 억지 주장을 내세우며, UN이 전쟁의 상대방이라는 이유로 UN의 선거관리를 결사적으로 거부했다.


여기서 설상가상으로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영연방 국가들은 독일문제에서와 마찬가지로 세계의 여론이 동의할 수 있는 기본 입장(basic position)을 결정하자고 주장하면서, 공산진영이 주장하는 “전 한국 총선거”를 지지하는 듯한 입장을 취했다. UN의 선거 관리와 외국군 철수문제를 둘러싼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간의 의견 대립뿐만 아니라, 자유진영 간에도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른 의견 차이로 인하여 회담의 성공은 매우 불투명해져 갔다.


하지만 제네바 회담에 임하는 이승만 정부의 입장은 단호했다. 대한민국에서 이미 총선거를 치러서 의회와 정부가 구성되어 있으므로, UN의 선거 감독 하에서 북한 지역에서만 자유선거를 치러서 대한민국에 흡수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승만 정부의 기본 입장이었다. 또한 이승만 정부는 북한에서 자유선거로 선출되는 의원 수도 남-북의 인구비례(2,400만명:500만명)에 입각하여 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북한의 남일은 이 마저도 1:1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양측은 접점을 찾기 어려웠다.


결국 변영태 외무장관은 1954년 5월 16일, 대한민국만의 독자적인 “14개 조항”을 제안했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UN 감독하의 자유선거, ▲ 북한지역에서만의 자유선거, ▲ 합의문 채택 후 6개월 이내 선거 실시, ▲ 선거 전후 UN 관리들의 자유선거 관리, ▲ 선거 후 통일된 입법부는 서울에 설치, .... ▲ 중국 공산군은 선거 당일부터 1개월 전에 완전 철수, ▲ 통일된 정부가 전국적으로 효과적인 통제가 이루어질 때까지 UN군 주둔, ▲ 통일된 한국의 독립을 UN이 보증 등... 이 14개 조항의 제안은 공산진영과 그 전제조건이 다르고(UN 감독 하의 자유선거), 영연방국가들의 주장과도 상반된 내용(북한만의 자유선거) 으로서 UN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북한지역을 일방적으로 흡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이승만의 지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변영태와 대한민국 대표단이 당시 회담의 분위기가 절충으로 흘러가자 위기의식에서 급조한 것이었다. 또한 이는 북한과 중국이 절대로 수용할 수 없는 조건들이었기 때문에, 변영태와 대표단이 회담에서의 합의를 의도했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미국을 제외한 자유진영 우방국들의 지지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변영태는 “UN 감독 하에서 북한지역의 자유선거”와 “한반도 내 외국군 철수” 문제에서 절대로 양보하지 않았고, 결국 회담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결렬되고 말았다. 


제네바 한국평화회담은 그 당시부터 현재까지 대한민국 정부들의 통일정책에 기본적인 원칙을 수립했던 사건이었다. 그 원칙은 바로 북한지역의 자유선거(인권) 문제와 흡수통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승만과 변영태는 당시의 6.25 전쟁으로 인하여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이 힘의 균형을 이룬 상황에서 공산진영이 절대로 양보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승만 정부는 이 회담이 남-북한 당사자가 원해서가 아니라, 관련국들의 명분을 위해 개최되었다는 것으로 파악한 듯하다. 따라서 어차피 양 진영의 합의가 불가능하다는 전제 하에, 이승만과 변영태는 대한민국의 입장을 강력하게 피력했다고 여겨진다. 


미국은 국제사회의 여론을 의식해서 어떤 식으로든, 또 최소한 자유진영 국가들끼리라도 회담의 공동 합의문을 도출하려고 노력했지만, 자유진영 내에서도 단일대오를 결성하지 못했고, 이승만 정부에 끌려 다니는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양 진영 간의 합의도출이 불가능했다는 것은 휴전이라는 한반도의 힘의 균형을 국제사회가 인정했던 것이기 때문에, 제네바 한국평화회담은 실제로 협상을 위한 회담이 아니었고, 단지 양 진영이 우호적 국제여론을 얻기 위한 형식적인 회담이었다. 따라서 이 회담은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양 진영의 이견과 대립을 최종적으로 확인하면서, 동시에 분단을 고착화 시켰던 사건이었다. 이후 더 이상의 한국평화회담을 불필요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회담은 개최되지 않았다. 따라서 한반도의 분단은 휴전조약이라는 국제법에 구속되며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권오중 / 외교국방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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