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탁통치 계획과 대한민국의 건국

권오중 / 2018-10-25 / 조회: 9,023

해방 한국에서 분단의 출발점은 제2차 대전의 종전과 동시에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 것이지만, 실제로 분단이 기정사실화 된 것은 미-소 공동위원회의 결렬이었다. 그리고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을 통해서 분단은 확정되었다.


한국이 해방되었다는 것은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났다는 것뿐이지 한국이 독립을 쟁취했다는 것과는 다른 의미였다. 즉 일본의 패망과 한국의 독립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 이유는 그 당시 국제사회에서 한국은 단지 일본의 지배지역이었을 뿐, 연합국의 승전에 대한 기여를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임정을 국제법적으로 인정하는 정부는 장개석의 중국 국민당 정부 뿐이었다. 미국 국무성 자료집(FRUS) ("The Far East 1942"의 제2권 875~877쪽)에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미국은 “임정”(망명정부)이 한국인을 대표한다고 인정하지 않았고, 단지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에 기생하는 집단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는 곧 “임정”이 국민의 선거로 선출된 합법적인 기구가 아니라, 망명자들의 단체라는 것이다. 비단 “임정”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모든 정치적 활동을 합법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제2차 대전에 참전(1941년 12월)하면서 미국의 참전 조건은 1941년 8월 14일 F. 루즈벨트와 W. 처칠 사이에 합의된 “대서양 헌장” (Atlantic Charta)에 제시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제 1~3항 “1) 양국은 영토의 확대를 원하지 않는다. 2) 관계 주민의 자유의사에 의하지 아니하는 영토 변경을 인정하지 않는다. 3) 주민이 정체(政體)를 선택하는 권리를 존중하며, 강탈된 주권과 자치(自治)가 회복될 것을 희망한다”가 핵심이었다. 이는 F. 루즈벨트 당시 미국 대통령이 설치했던 함정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에도 불구하고 전후 국제 질서에서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의 열강들이 주도하는 구도를 깨지 못했다. 당시 윌슨의 민족자결원칙은 패전국의 지배를 받았던 민족에게만 적용되었기 때문에, 영국, 프랑스, 일본 등의 식민지는 유지되었고, 오히려 더욱 확정되었다. 그래서 실제로 국제질서에서 미국이 얻는 이익은 거의 없었다.


F. 루즈벨트는 제2차 세계대전을 영국과 프랑스 등이 주도하는 국제질서를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겼다. 즉 피 지배 지역의 민족을 모두 독립시킨다는 의미의 제3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처럼 패전국의 지배민족 뿐만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 등의 식민지도 모두 포함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기존 제국주의 열강들의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고, 피 지배 민족의 독립과 해방지역에 서구식 민주주의를 이식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재편된 전후질서를 주도하려는 것이 미국의 의도였다.


그리고 미국의 의도를 위해 등장했던 것이 F. 루즈벨트의 “신탁통치안”이었다. 신탁통치란 자치능력이 없는 해방지역이 서구식 정치(민주주의), 경제(자본주의) 시스템을 습득하고, 스스로 자치능력을 갖게 될 때까지 미국과 해당지역에 연고가 있는 국가들이 해당지역을 함께 대리통치하는 것이었다.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는 1943년 3월에 F. 루즈벨트와 영국수상 이든 사이에 원칙적으로 합의되었고, 1943년 12월 1일 카이로 회담에서 F. 루즈벨트, 장개석 그리고 교체된 영국수상 처칠 사이에서 적절한 시기 (in due Course)에 독립할 때 까지 신탁통치를 하기로 합의되었다. 즉, 한반도 신탁통치에 참여할 국가들은 최초에 미국과 영국 그리고 중국이었다.


그러나 나치독일의 항복이후에 태평양 전쟁도 신속히 마무리 짓고자 했던 미국(트루먼)은 포츠담 회담에서 소련의 대 일본전 참전을 조건으로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의 작전구역을 설정했다. 항공과 해상 작전권은 한반도 전체를 미국이 가지고, 지상 작전권은 38도선 이북을 소련에게 이양되었다.(Foreign Relations of United States, The United States Chief of Staff to the Soviet Chief of Staff, 24. Juli 1945, The Conference of Berlin(Potsdam), Vol. 2, 1327~1328 쪽) 이로 인하여 일본의 항복이후 한반도 38도선 이북에 대한 기득권도 소련에게 이양되면서,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에 대한 권리도 중국을 대신해서 소련이 갖게 되었다. 포츠담 회담에서 미국이 소련에게 한반도의 38도선 이북을 양보한 것은 이후 현재까지 한반도 분단을 초래하는 출발점이다. 일본에 대한 원폭을 미리 결정했다면, 미국은 소련에게 이러한 양보를 하지 않을 것이고, 한반도 분단의 단초도 제공되지 않았을 것이다.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일단 일본으로부터의 분리, 소련과의 분할 점령 그리고 신탁통치였다. 미국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메이지 유신이후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획득한 일본의 점령지역을 모두 분리시켰는데, 이 당시에 한반도뿐만 아니라 독도와 대마도, 대만 그리고 오키나와(류구) 제도 등도 모두 일본으로부터 분리 되었었다. 그리고 미국은 신탁통치를 한반도에만 국한해서 진행하려고 했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미국과 소련, 영국은 한국에 대한 5년의 신탁통치를 결정했는데, 이를 위한 위원회에 한국의 “민주적인 정당과 사회단체”를 포함시키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이 합의는 실현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민주적”이라는 단어의 개념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에서 민주주의의 의미는 구 소련 백과사전에서 정의했듯이, “프롤레타리아 1당 독재”이다. 이는 이후 공산주의 국가들의 명칭이 “...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고 했던 것에서 잘 나타난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이념과 정책을 가진 정당들이 자유선거를 통해 경쟁하고 다수결 원칙에 입각해서 정책을 실현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공산진영과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은 전혀 다르기 때문에,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를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 구성은 실현될 수 없었던 것이다. 경제적인 개념에서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차이와 마찬가지로, 미-소 공동위원회의 실패는 이념의 이질성을 나타냈던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이후 첫 번째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문제는 1953년 3월 10일 스탈린 공한을 통한 중립화 독일통일 제안에서도 똑같이 반복되었다.


신탁통치 문제는 국내에서도 공산주의 진영은 찬탁을 자유민주주의 진영은 반탁을 주장하며 격렬한 정치적 대립을 야기 시켰다. 해방 직후 당시에는 공산주의 진영이 참여하는 신탁통치가 한반도 공산화를 초래할 수 있다고 판단한 미군정은 반탁운동을 배후에서 지원했다. 이는 미국이 당초에 구상했던 것과 배치되는 결정이었지만, 한반도를 공산진영에 뺏기는 것 보다는 나은 선택이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빠르게 간파한 인물이 이승만이었다. 그는 미국과 교감을 하지 않았어도 미국과 소련은 이념의 차이로 인하여 절대로 협력할 수 없고, 이 두 국가는 이념을 매개로 한반도를 나눠서 차지하려는 전략을 알아챘기 때문에, 1946년 정읍발언을 통해 남한만의 단독정부 구성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미국도 환영했을 것이다.


실제로 해방지역으로서 미국과 소련이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던 한반도에서 통일한국은 우리 국민의 힘으로 성취하기 불가능했다. 그나마 대서양 헌장이 없었다면, 미국과 소련의 식민지로 전락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의 신속한 대응은 미국뿐만 아니라 소련도 환영할 만한 것이었을 것이다. 반면에 미-소 공동위원회의 실패가 군정(실질적 식민지)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도 있었던 상황으로 전개되었다면 독립이 요원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분단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임을 인지하고, 남한 단독정부 구성을 주장했다. 그래서 우리 국민은 군정의 무기한 유지라는 최악의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서로 다른 이념의 남북한 단독정부가 수립되며, 미국과 소련이 주도했던 동아시아적 포츠담체제는 완성되었다.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선택한 대한민국은 비록 이승만 정부 당대에는 오히려 북한에 비해 여러 분야에서 열세였지만, 자유당 정권의 몰락이후 지속적인 발전을 통해 오늘날 당당히 G20국가의 반열에 진입했고, 체제의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다.


권오중 외교국방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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