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한국 자유선거의 문제 (1948~1954)

권오중 / 2018-09-20 / 조회: 319

1949년 8월 14일 서독의 초대 수상 K.아데나워가 연방의회 발언에서 “통일은 당장의 목표가 아니라 장기적 목표”라고 했던 것처럼, 남-북한 간의 긴장완화 그리고 장기적인 협력과 교류는 한반도 통일을 위한 장기적 목표를 향한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한반도의 평화정착은 통일을 의미하지 않는다. 북한의 체제를 보장하는 상태에서, 다시 말해  남과 북이 상이한 두 체제를 유지하는 상태에서 어느 한 체제로 통일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통일이 된다면 어느 한 체제로의 흡수통일이 되거나, 아니면 전쟁을 통한 휴전체제의 파기와 무력통일이라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런데 체제흡수도 아니고 전쟁도 아니라면, “1국가 2체제”, 즉 “연방제” 라는 방법도 제시되고 있으나, 역사상 서로 다른 2체제의 연방은 존재했던 사례도 없었고,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에, 실현가능성이 없다고 여겨진다.


남-북한이 동일한 체제를 유지하려면, 동일한 총선을 치러야 한다. 그러나 남-북한이 동일한 총선을 치루지 못했기 때문에, 1948년에 분단이 시작되었다. 1946/7년 2차례의 미-소 공동위원회가 실패한 이유가 “민주적”이라는 단어의 개념차이 때문이었다. 결국 “민주주의”에 대한 상반된 이해로 인하여 남-북한은 서로 다른 “민주주의 체제” (자유민주주의 / 공산주의)를' 선택하였다.


대한민국의 건국과 정부수립을 위한 제헌의회 선거는 1948년 5월 10일에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는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거부했던 임시정부 계열 세력이 자의적으로 참여하지 않았고, 선거의 결과 전체 303명의 제헌의회 의원 중 203명이 선출되었고, 100석을 북한지역의 몫으로 공석으로 남겨두었다. 이는 인구비율에 따른 의원 배분이었다. 남한 측은 북한에게 자유선거를 통해 선출된 100명의 의원을 보내라고 제안했지만, 북한 측에서는 이를 거부하고 1948년 8월 25일 북한만의 선거를 통해 전원 공산당 소속의 360명을 선출하였다. 이로써 남-북한에서는 서로 다른 체제의 2개의 분단국가가 탄생되었다. 이후 “전 한국 총선거” 문제는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인 체제 통일의 명분으로서 1954년 제네바 한국평화회담 당시까지 뜨거운 이슈였다.


“6.25 전쟁”(1950.6.25.~1953.7.27)은 통일의 한 방법이었던 무력통일, 즉 이념이 다른 두 체제가 무력을 통해 하나의 통일된 체제로 통일하려했던 시도였다. 하지만 이 시도는 실패하였고, 휴전조약 제4항에 규정된 “한국 평화회담”(1954.4.26.~6.15)에서 “남-북한 한국 총선거” 문제는 다시 가장 핵심적인 의제였다. 여기서 대한민국 대표 변영태 외무부 장관은 “14개 조항”을 제안했다. 여기서 핵심적인 사항은 “UN 감시하의 북한만의 자유선거를 6개월 이내에 실시하며, 북한의 선거 전후에 UN이 자유선거를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이미 자유선거가 실행되었으므로, 북한지역에서만 남한과의 인구비례에 따라 자유선거를 별도로 실시하여, 대한민국 국회에 들어오라는 것이 이승만의 전보지시를 받은 변영태의 논리였다.


반면에 북한의 남일 외무상은 대한민국의 제안을 거부하고 “남북한 동시 총선거와 6개월 이내 외국군 완전 철수”등을 주장하였다. 이는 UN의 감시도 거부하면서, UN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또한 남일은 남북한 동시 총선거에서 남과 북한의 인구비례가 아니라 남과 북한 지역을 1:1로 간주하여 국회의원수도 동수로 하자고 주장했다. 변영태와 남일의 요구는 서로가 수용하기 불가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제네바 한국평화회담은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였고, 이를 통해 휴전체제를 협상을 통해 재편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져버렸다.


제네바 한국평화회담은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처음이자 마지막 관련국 회담이었다. 그러나 회담이 결렬된 이후 한반도 문제에서 총선거 문제는 국제사회에서 단 한 번도 논의조차 되지 못했다. 이로써 한반도의 분단의 고착은 국제사회에서 기정사실화 되었다.


두 국가의 통일이라는 것은 동일한 체제로의 ‘하나 됨’을 의미한다. 만약에 북한 측이 남-북 간의 체제 통일을 원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체제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할 것이고, 또한 설령 북한 측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로의 통일을 수용한다 하더라도 북한 지역의 자유선거 실시와 그 관리의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에서도 1954년 제네바 한국평화회담에서와 동일한 갈등이 재현될 것이다.


앞으로 남북한 관계가 호전되고 통일을 진정으로 논의한다면, 체제통일과 전 한국 총선거 문제는 반드시 합의를 필요로 하는 문제이다. 남-북한에서 인구비례에 따른 공정한 관리의 자유선거인가?, 아니면 남-북한을 1:1로 인정한 남북한의 개별적인 선거인가? 이 문제는 결국 통일에 가장 큰 장애요인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에서 1948년 남북한의 단독정부 수립시기부터 1954년 제네바 한국평화회담 당시까지 남-북한이 격렬하게 대립했고, 결론이 도출되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휴전체제라는 국제법적 문제를 무시하고 한반도 문제를 논의할 수 없다. 이는 과거 독일의 통일이 “2+4조약”, 즉 동-서독과 포츠담조약 서명4국(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조약을 통해 실현되었듯이, 한반도의 통일은 현재 분단구조를 만든 미국(6.25 참전 UN 16개국 대표)과 중국, 북한의 합의 없이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휴전체제의 책임당사국들이 만약에 남-북한의 통일에 합의하게 된다면, 그 이후 남-북한은 통일된 체제에 합의해야하고, 그 체제에 따라 남-북한에서 1) 자유선거, 2) 공정한 선거관리, 3) 인구비례에 따른 선거구 획정 등이 실현되어야 한다. 이는 1954년 제네바 한국평화회담 당시 우리정부의 기본 입장이기도 하고, 과거 동-서독 통일과 하나의 체제로 전환했던 과정의 사례에서도 실현된 방법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과제가 북한지역 주민들에게 “민족자결원칙”의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다.


권오중 외교국방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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