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은 사람을 도와야지 맹목적으로 특정집단을 돕는 것으로 변질되어선 안된다.   - 프리드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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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이재용 회장과 평범한 재산 수준의 나, 누가 더 행복할까?

314 황정민 | 2017-01-11 | 조회수: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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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격차는 흔히 우리 사회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해소’해야 할 나쁜 것이라고 여겨진다. 격차의 해소를 이야기 할 때면 '평등’에 대한 우호적 설명이 필수적으로 따라붙는다. 평등은 2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결과의 평등과 기회의 평등이 그것이다. 결과의 평등은 대다수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동일한 결과를 보장하겠다고 주장한 공산주의 실패의 역사가 이를 증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기회의 평등이다. 결과의 평등은 부정하는 대다수의 청년들도 기회의 평등만큼은 우리 사회 '정의’를 위해 반드시 구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더욱이 기회의 평등을 가로막는 빈부의 격차는 반드시 개선되어야 한다고 간주한다. 경제 교과서에서 지니계수·10분위 배율·상대적 빈곤율 등, 부의 격차를 수치화하는 방법은 교육해도 시장경제가 역사상 가장 공정하고 누구에게나 기회가 열려있는 체제라는 점은 가르치지 않기 때문일까. 청년들은 부의 강제적이고 평등한 분배를 의미하는 '경제민주화’ 담론에는 감성적으로 쉽게 동의하지만, 부의 소유권과 격차를 인정하는 '경제자유화’ 논리는 재벌앞잡이 같다며 거부감을 느낀다. 이는 곧 자유주의 시장경제에 대한 근본적 오해와 분노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많은 이들이 대한민국은 기회의 평등이 지켜지지 않는 나라라고 이야기한다. 모두에게 평등한 기회가 주어지려면 그 출발 지점부터 동일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애초에 그 출발선부터 부의 격차가 너무 커, 기회의 평등이 박탈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누구는 태어나면서부터 벤츠를 타고 결승선으로 빠르게 달리는데 누구는 낡은 수레에 타게 된다고 비관한다. 더군다나 그 원인이 자본주의 특성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빈자는 더욱 빈곤해지고, 부자는 더욱 부유해져서 결국, 격차는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을 만큼 벌어진다고 지적한다. 소위 금수저·흙수저 계급론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주장에 몇 가지 의문점이 생겼다.

 

궁금증 하나: 금수저의 기준은 무엇인가?

 

 흔히 통용되는 '금수저’는 부모의 재산이 많은 사람을 의미한다. 그런데 부모의 외모가 뛰어나 훌륭한 외모를 물려받은 이는? 뛰어난 아이큐를 물려받은 이는? 춤과 노래 등의 끼를 물려받은 이는? 매력(외모는 별로임에도 호감형)을 물려받은 이는? 타고난 운동신경을 물려받은 이는? 성실함을 물려받은 이는? 사람을 현혹하는 말재주를 물려받은 이는? 이들은 금수저가 아닌 것인가. 오히려 요즘엔 재산 이외에 운동신경과 말재주, 끼 등이 더 큰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청소년이 존경하는 인물 1위는 피겨스케이팅 선수 김연아가, 3위는 방송인 유재석이 차지하고 있는 사실만 봐도 그렇다. 김연아 선수는 운동신경을 타고났고, 유재석 씨는 말재주와 끼를 타고났다. 그들과 나의 태생적 격차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자연스러운 섭리다. 이들에게도 '상속세’와 같은 '운동능력세’, '말빨(?)세’를 물려야 하나? 물론 타고난 것 이외에 개인의 꾸준한 노력도 필수적으로 뒤따랐을 것이다. 그것은 물려받은 재산을 유지하는 데에도 노력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다. 타고난 재산만 믿고 방탕하게 살다가 사회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사람도 여럿 있다. 이처럼 모든 개인에겐 격차가 존재한다. 즉, 남보다 잘난 혹은 못난 '무엇’인가 있게 마련이고, 그 '무엇’을 깨닫고 잘난 점은 발전시키고 못난 점은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사회에 큰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궁금증 둘: 우리는 왜 모두 같은 출발선상에 서 있어야 하나?

 

 “모두가 동일한 출발선상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모두가 동일한 목표를 향해 달린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흔히 말하는 '사회적 성공’이 그 목표가 될 것이다. 높은 연봉, 안정적 지위, 훌륭한 배우자 등이 그 기준이다. 그런데 그 기준은 누가 만든 것인가. 흔히 어른들은 청년에게 꿈을 품으라고, 열정을 가지라고 조언한다. 그 꿈은 정녕 평생 잘릴 걱정 없는 공무원, 높은 연봉의 대기업 사원, 혹은 학벌과 집안이 좋은 배우자밖에 될 수 없는 것인가. 모두가 똑같이 자신의 열정을 이처럼 사회가 만들어 놓은 가치에 쏟아야 하는 것인가.

 

 누구나 행복과 성공의 조건이 다르다. 사회가 임의적으로 만들어놓은 '행복한 인생루트’에 나를 끼워 맞추려 할 때, 불행은 시작된다. 한국인의 행복지수가 늘 저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본다. (일각에선 소득의 불평등 때문이라고 하지만 우리보다 소득격차가 더 큰 미국인의 행복지수가 우리보다 훨씬 높다.) 어떤 이는 자신만의 창의적 발상으로 기업을 운영할 때, 어떤 이는 예술적 감각을 누군가에게 뽐낼 때, 어떤 이는 학생을 가르칠 때, 어떤 이는 서비스정신으로 고객을 만족시켰을 때 등등 저마다 '내가 살아있음’, 즉 성취감과 행복을 느끼는 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나라를 위한다는 마음으로 공무원의 길을 택한 이들의 진정성도 포함된다.) 그래서 격차 없이 같은 출발선상에 서 있어야 한다는 말은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다. 다른 출발선상에서 저마다 다른 결과를 향해 달리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궁금증 셋: 격차를 우리는 모두 즐겁게 소비하고 있지 않나?

 

 상상해보자. 격차 없이 동일한 품질의 맥주를. 과거 한국 맥주 시장이 그랬다. 맹맹한 맛의 라거(Larger)가 소비자의 입을 가로막고 있었는데, 수입 맥주가 기존 국내 맥주에선 찾을 수 없었던 진한 맛과 저렴해진 가격을 무기로 국내시장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편의점에서 구매할 수 있는 '4캔 1만원’은 맥주 애호가들의 행복이 됐다. 급기야 수입 맥주는 국내시장 점유율 40%를 돌파했다. 수입 맥주가 국내시장에 선물한 '맛의 격차’로 소비자들은 선택의 폭이 넓어졌고, 안주하고 있던 국내 맥주 회사는 맛의 차별화를 시도했다. 모두에게 선순환이 일어난 것이다.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의 저서 <선택의 자유>에 서술된 구절이 이러한 원리를 잘 설명한다.

 

“삶은 공평하지 않다. 자연이 낳은 것을 정부가 수정할 수 있다고 믿고 싶은 유혹도 생긴다. 그러나 우리가 한탄하는 적잖은 불공평에서 얼마나 많은 이익을 얻고 있는지 깨닫는 것 또한 중요하다. 무하마드 알리가 위대한 권투선수가 될 수 있는 기술을 타고났다는 사실은 결코 공평하지 못하며, 무하마드 알리가 하룻밤에 수백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도 분명 공평하지 못하다. 그러나 평등이라는 추상적 이상을 추구하느라, 알리가 하룻밤 경기에서 벌 수 있는 돈이 최하층 사림이 부두에서 하루 동안의 비숙련 노동으로 벌 수 있는 돈보다 많아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알리를 보며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불공평한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부러움’이다

 

 '불공정한 게임’이라고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을 때가 있다. '왜 우리 부모님은.. 왜 이 나라는..’이라며 말이다. 그 길이 가장 손쉽고 마음에 위안이 된다. 문제의 원인을 나 자신에서 찾는 것만큼 괴롭고 인정하기 힘든 일도 없기 때문이다. 인생의 혹한기에 이런 '격차에 대한 분노’ 감정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기 쉽다. 길지 않은 인생을 산 청년들 기억 속엔 대학입시와 취업시즌이 대표적이다. 입시가 힘들 때는 '역시 개천에서 용 나기 힘든 세상이라더니’라면서 불공정한 고액 사교육 시장을 대학 낙방의 원흉으로 지적한다. 취업이 어려울 때는 '역시 고액 사교육을 받고 좋은 대학에 진학한 금수저들이 저 앞에서 뛰고 있어 나는 취업이 힘들다’고 불평한다. 그런데 나도 누군가에겐 상대적으로 고액 사교육을 받은 사람이며 상대적으로 양질의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지 않을까. 누군가보단 조금은 더 뛰어난 아이큐로 교과서 암기시간을 10분이라도 절약하지 않았을까. 누군가보단 조금은 더 뛰어난 부지런함으로 출석점수를 높게 받지는 않았을까. 이 세상은 1부터 100까지 다양한 조건의 사람들이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1부터 100까지의 다양성은 무시한 채, 1대 99의 프레임 속에서 격차에 대한 분노 키우기에만 열중하고 있는 듯하다.

 

내가 좋은 그 곳이 나의 길

 

 또한 우리는 눈에 보이는 조건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많은 재산을 타고난 '재벌2세’는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다. 명백한 위법행위를 하지 않았음에도 일단 도덕적으로 '나쁜 놈’이 되어있다. 후진적이고 비이성적이다. 삼성의 이재용회장과 평범한 재산수준의 나, 누가 더 행복한 삶을 살게 될까. '재산의 크기’만 저울 위에 올려놓는다면 당연히 이재용 회장이 더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재산 이외에도 우리 삶을 행복하게 하는 조건은 너무나도 다양하다. 내 삶이 행복해지는 조건은 나만이 알 수 있으며, 나만이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타인과의 '격차’에 대해 맹목적으로 분노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오히려 그 격차가 나만의 인생을 만들어주는 원동력이자 나만의 가치를 빛내게 하는 가능성이다. 자신이 선택한 꿈에 닿기 위해 각자의 길을 걷고 있는 이 시대 청년들을 위해 노래 한곡을 추천하며 글을 마친다.

 

 

지친 하루 / 윤종신

 

거기까지라고
누군가 툭 한마디 던지면
그렇지 하고 포기할 것 같아
잘한 거라 토닥이면
왈칵 눈물이 날 것만 같아
발걸음은 잠시 쉬고 싶은걸
하지만 그럴 수 없어 하나뿐인 걸
지금까지 내 꿈은
오늘 이 기분 때문에
모든 걸 되돌릴 수 없어
비교하지 마 상관하지 마
누가 그게 옳은 길이래
옳은 길 따위는 없는 걸
내가 좋은 그 곳이 나의 길
부러운 친구의 여유에
질투하지는 마
순서가 조금 다른 것 뿐
(중략...)
비교하지 마 상관하지 마
누가 그게 옳은 길이래
옳은 길 따위는 없는 걸
내가 걷는 이곳이 나의 길
옳은 길 따위는 없는 걸
내가 택한 이곳이 나의 길

 


황 정 민 │ 자유경제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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