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통: ‘컬러(color)’로 세상을 매혹하다

67 김인영 | 2016-12-23 | 조회수: 3,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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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콘서티나와 자전거를 팔아 중고 편물기계를 구입하다


베테통(Benetton)은 지금으로부터 61년 전 1955년 이탈리아 베네토(Veneto)의 한 시골에서 시작되었다. 베네토의 폰자노(Ponzano)에서 루치아노 베네통(Luciano Benetton)이 여동생 줄리아나(Giuliana)와 스웨터를 만들어 '트레조리’라는 브랜드를 붙여 판매한 것이 그 시작이다. 베네통은 오빠와 여동생의 가족회사(family business)로 시작했고, 남동생 질베르토(Gilberto)와 카를로(Carlo)가 합류하여 'Benetton Group’으로 가족회사 체제를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그림 1>, <그림 2> 참조) 의류, 신발, 가방, 액세서리로 제품을 다양화했지만 주력은 의류 생산과 유통이다. 


<그림 1> 루치아노 베네통

 

<그림 2> 베네통 가족

베네통은 현재 전 세계 120여개 국가에서 6,500개의 의류 매장을 가지고 있다. 의류 브랜드로는 'UNITED COLORS OF BENETTON'과 정통 패션 브랜드로 SISLEY, 스포츠 브랜드로 PLAYLIFE, KILLERLOOP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베네통은 2015년 약 7,700 여명을 고용하고 있으며, 15억3천만 유로(Euro, 약 16억 달러)의 수익을 올리고 있는 세계적인 의류 브랜드이다. 


창업자 루치아노 베네통은 스무 살의 나이로 18살이었던 여동생 줄리아나(Giuliana)를 설득하여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을 시작한 계기는 1945년 아버지가 사망하고 나서 4 남매의 장남으로서 집안의 생계를 책임진 루치아노가 먹고 사는 방책을 모색한 것이었다. 즉, 생계의 수단을 찾다가 솜씨 좋은 여동생 줄리아노가 짠 풀 오버 스웨터를 내다 판 것이 사업의 시작이었다. 


루치아노 베네통이 사업을 시작할 당시 이탈리아는 2차 세계 대전 후 지독한 가난과 불황에서 벗어나 유럽 국가들에 비해 두 배라는 경이적인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스웨터는 영국제 소모사, 램 울(lamb wool), 또는 캐시미어로 만든 고가품 스웨터, 손으로 직접 뜬 오리지널 스웨터, 기계로 뜬 중간 가격의 스웨터의 3가지 제품군이 있었는데 루치아노는 생기발랄하며 남녀 공용으로 재킷이나 바지와 편하게 맞춰 입는 스웨터, 즉 당시의 나아지고 있는 경제환경에 어울리는 밝고 실용적인 스웨터를 공급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편물기계를 들여 놓고 본격적으로 가내수공업 수준의 사업을 시작하는 단계에 이르자 당시 18살이었던 여동생 줄리아나가 “(오빠) 너무 위험하다. 우리만으로 착수하기에는 아직 너무 어리다”라고 걱정했다. 하지만 20살의 오빠 루치아노는 “해보자” “할 수 있다”의 의지로 여동생을 설득하며 밀고 나갔다. 루치아노가 신문팔이, 가게 점원 등 여러 일을 했지만 어머니를 포함한 5인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다른 방도가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공장은 따로 없었고 집안에 기계를 두고 스웨터를 짜야할 형편이었다. 하지만 스웨터를 짤 편물기계를 구입할 자금이 없어 자신의 콘서티나(Concertina, 아코디언 비슷한 6각형의 악기. <그림 3> 참조)를 팔아 3만 6천 리라를 구해 중고 편물기계 가격의 10분의 1을 만들고, 남동생 질베르토(Gilberto)의 자전거를 팔고, 친구들과 친척들에게 조금씩 빌리는 등 3달에 걸쳐 30만 리라를 마련하였다. 콘서티나와 자전거를 팔아 중고 편물기계를 집안에 들여 놓고 시작한 사업은 진실로 미미했다.


<그림 3> 콘서티나


처음 만들어낸 스웨터의 상표는 당시 패션 선진국이었던 프랑스풍을 따라 '트레조리’라고 명명하였다. 스웨터는 처음에는 동네와 주변지역에서 주로 팔렸고, 베네토 지역에서 성공을 거두고, 로마(Rome)로 판매 지역을 확장하였다. 시대의 분위기에 맞는 밝은 색상 전략은 커다란 인기를 끌었고 대성공을 거두었다. 


고가의 스웨터가 아니었기에 판매 대상은 주로 젊은이들이었다. 스웨터의 디자인은 영국의 니트웨어 흐름에 따라 지극히 심플하지만 노랑, 녹색, 밝은 청색 등으로 제품을 만들어 평범한 색에 싫증이 나 있던 젊은 구매자들을 사로잡았다. 당시 일반적이었던 무난한 색조를 탈피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밝고 산뜻한 색상들을 선택했던 것이었다. 밝은 색상의 스웨터가 폭발적으로 인기를 끌고 크게 히트하자 루치아노 베네통은 '색상’(color)이 세일즈 포인트가 됨을 깨닫게 되었다. 즉 사람의 마음, 특히 젊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옷을 사게 하는 것은 결국 '색’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당시의 밝은 경제상황을 반영한 순발력 있는 기업가적 대응이었지만, 결국 '창조적 독점’(creative monopoly)을 결과했다. 당시에 어디에도 산뜻한 색상의 옷을 팔지 않았기 때문이다. 루치아노 베네통은 “손님들은 마치 색채에 굶주렸던 것처럼, 그리고 전쟁으로 억눌려 있던 생동감을 일시에 만회하려는 듯이 앞 다퉈 우리의 알록달록한 스웨터를 사갔다.”고 회고했다. 독특한 밝은 색상이 주효했지만 '트레조리’ 스웨터의 성공 원인으로 색상 이외에도 착용의 편리성, 젊은이들이 지불할 수 있을 정도의 저렴한 가격 책정도 포함되어야 한다. 


초기부터 지금까지의 사업 성공의 원인에 대하여 루치아노 베네통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업을 시작할 때는 두말 할 것 없이 '컬러’로 성공을 했어요. 저는 '유나이티드 컬러즈’라는 개념과 실체를 시대가 지지해 줬다고 판단하고 있어요. 젊은 사람들이 컬러풀한 색의 옷을 입고 싶은데 그런 옷이 시장에 없다는 현실 속에서 우리가 컬러풀하고 질 좋은 제품을 젊은이들에게 제공한 겁니다. 이것이 성공 요인이겠죠. 그  후 우리가 더 분발해서 승부를 내고자 한 부분이 '가격’입니다. 이것도 시대와 잘 맞아 떨어졌지요. 실제로 베네통의 제품은 지난 45년 내내 동일한 가격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요. 기술을 도입해서 여러 가지 기능을 가진 신소재를 사용하면서도 젊은이들이 살 수 있는 가격으로 제품을 제공하겠다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거든요.” (강조는 필자가 한 것임.)

 

베네통의 제품의 특징은 풍부한 색의 사용, 특히 이제까지 접하지 못했던 색상의 발견, 다시 말해 초록색이라고 하더라도 베네통의 초록색은 기존의 우리들의 눈에 익은 초록색과 다른 색을 만들어 냈고 또한 색의 어우러짐이 매우 감각적이었다. 이러한 색의 창조는 오랜 염색 기술을 가진 이탈리아 전통 산업 장인들에 의해서 가능했다. 유니클로가 일본의 고도의 합섬섬유 기술을 기반으로 세계화할 수 있었던 것처럼, 베네통은 이탈리아의 전통 염색 기술을 기반으로 하여 이탈리아가 만든 창조적 색상을  세계적인 차원으로 끌어 올린 것이었다.     


2. '후염색’ 기술을 창안해 효율성을 높이다


독특한 '색상’ 이외에 1950년대 말과 60년대 초 '트레조리’가 다른 수많은 경쟁기업들에게 영역을 빼앗기지 않고 판매 영역을 확대하며 경쟁자를 따돌린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루치아노 베네통은 스웨터 판매가 호조를 보이고 로마에 진출하던 1961~63년 기간 두 가지 혁신적인 공법을 도입한다. 두 가지 혁신에 근거하여 다른 동종 기업들에 앞서가기 시작한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첫 번째 혁신은 1962년 시작된 선진 영국 제조공법의 도입이다. 로마로 판매지역을 넓히기 전 시장조사를 한 루치아노 베네통은 로마인들이 신선한 색상, 다양한 용도, 저렴한 니트웨어에 추가적으로 영국제 캐시미어와 같은 소프트한 느낌의 직물을 원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이를 해결하고자 루치아노 베네통은 런던을 방문하여 캐시미어의 소프트한 느낌을 주는 원단 제조법을 배우고 이탈리아로 와서 자신의 스웨터 생산에 적용한다. 당시 영국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니트웨어 메이커들이 즐비했고 생산 공장을 돌아다니며 관찰로 “이탈리아에서 들은 적도 없는” 생산 방식을 배웠다고 루치아노는 회고하고 있다. 이러한 선진 영국의 직물 제조공법 도입으로 '트레조리’의 품질은 비약적으로 향상하게 된다. 


두 번째 혁신은 기존의 '선(先) 염색’ 후 제조가 아니라 스웨터를 완성한 후 염색하는 '후염색’ 기술의 창안과 적용이다. 색의 유행은 변하기 쉬운데 처음부터 유행에 따라 새로이 색깔을 적용하여 1주일 이내에 납기 할 수 있게 되었다. 염색이 안 된 실로 스웨터를 제작한 뒤 유행하는 색을 염색해서 제공하니 납기를 혁신적으로 단축시키게 되었고 타른 기업에 경쟁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후염색’ 기술은 새로운 발상이고 종래의 생산공정의 상식을 깨뜨린 혁명적 발상이었다. '트레조리’(후 베네통으로 개명)는 '후염색’ 기술의 도입으로 큰 도약을 하게 된다.  


사업 시작부터 '색상’의 중요함을 깨달은 루치아노는 새로운 색을 만들어 내기 위해 염색가 집안의 애드 몬타나를 영입한다. 트리에스테 출신의 애드 몬타나는 집안 대대로 몇 대에 걸쳐 염색에 종사해온 자부심 많은 재염색 기술자였다. 두 사람은 저녁마다 만나 새롭고 매력적인 '색’ 만들기 실험에 몰두했고, 결국 새로운 색상 발견과 함께 '후염색’ 방법을 찾아내게 된다. 


위의 두 가지 기술혁신으로 '트레조리’는 저가(低價)이면서 캐시미어처럼 부드러운 스에터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고 색다른 색에서 당시의 유행 색까지 적용할 색의 폭이 넓어져 경쟁하는 동종기업에 대한 경쟁력을 가지되었다.


3. 매장에서의 '선택의 자유로움’으로 소비자를 매혹하다


루치아노 베네통의 새로운 도전은 매장 혁신이었다. 루치아노는 청년시절 양복점 점원으로 일한 경험이 있었다. 그가 했던 일은 카운터 앞에서 양복점 주인이 손님에게 보여줄 제품을 지시하면 카운터 안쪽의 선반에서 쌓아올린 상자들 가운데 제품을 찾아 물건을 가져다주는 일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손님이 찾을 만한 물건을 골라내는 작업은 힘들고 효율적이지도 못했다. 그래서 그는 늘 상품을 상자에 넣어두지 않고, 표를 붙여 늘어 놓으면 직원도 편하고 또 손님은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판매원에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자신이 원하는 상품을 직접 고를 수 있고, 상품들이 서로를 뽐내면 매장도 멋있어 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이러한 개방형 디스플레이를 시도한 가게가 없었다.


루치아노는 손님을 물건으로부터 가로막는 카운터를 없애고 물건을 벽과 책상에 디스플레이 해놓고 직접 손님이 골라서 만져보고 자신에게 맞는지 고민해보게 하는 방식의 개방형 디스플레이를 새로 개설하는 스웨터 전문 매장에 적용하였다. 지금은 일반화된 디스플레이 방식이지만 당시에는 혁신적인 시도였다. 이는 심리학적으로 젊은이들의 물건 선택의 자주성을 자극하는, 즉 자신의 옷은 누구의 도움 없이 자유롭게 자신이 선택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이러한 손님에게 자유 선택권을 주는 방식의 디스플레이는 큰 호응을 얻었고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그림 4>, <그림 5> 참조)



<그림 4> 베네통 매장 전경 <그림 5> 베네통 매장 내부

 

상점을 생기 넘치게 하고, 물건에 접근하기 쉽게 하며, 손님 스스로 구입을 결정하게 하는 '자기 선택’에 의한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구조로 모든 매장을 바꾸었다. 그리고 젊은이들의 취향에 맞게 매장 음악의 비트를 바르게 하고, 손님이 물건 모두를 만져보며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환상을 실현하게 하였다. 인간 본성에 기초한  소비자의 '선택의 자유’(freedom to choose) 확보라는 대단히 창의적인 디스플레이로 다른 의류 매장에 대하여 차별성과 경쟁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루치아노 베네통은 이즈음 이러한 자신만의 방향으로 생산과 판매 방식을 만들어가며 회사를 설립하여 자신의 가문 이름을 적용해 '베네통 주식회사’를 발족시켰다. 1965년 탄생한 회사 베네통에는 루치아노 베네통이 회장(chairman)을, 남동생 길베르토가 사무(administration)를, 남동생 카를로가 생산(production)을 그리고 여동생 줄리아나가 선임 디자이너(chief designer)를 맡아 가족기업의 형태를 갖춘다. 물론 '트레조리’라는 브랜드 대신 '베네통’(Benetton) 또는 '베네통 스타일’(Style Benetton)이라는 가족 이름을 딴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4. 메시지 광고로 베네통 브랜드를 각인시키다


베네통 전문 매장은 이탈리아 벨루노(Belluno, 1966)를 시작으로 코르티나(1966), 프랑스 파리(1969), 영국 런던, 스페인 마드리드, 독일 베를린, 이집트(1988), 소련 모스크바(1990)으로 급속히 세계로 확대되었다. 프랑스의 경우 베네통 매장은 1976년 50개였지만 2년 만에 300개로 늘어나는 성공을 거두었다. 패션의 선진국이자 패션의 본거지에 베네통 매장이 진출하여 성공을 거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성공이었다. 


베네통은 전 세계적으로 새로운 색상으로 유행을 창조하였다. 하지만 새로운 색과 더불어 매장의 디스플레이는 유럽에서는 'American Style’ - 예를 들어 '진스 웨스트' -로, 미국에서는 고급스러운 ’European Style'을 택하는 역발상의 시도로 양 대륙의 소비자들에 신선한 감을 주었다. 


광고에서도 혁신을 추구하였다. 광고는 유럽 스타일도 미국 스타일도 아닌 전 세계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컨셉으로 유행을 창조하였다. 베네통 광고는 신선하지만 쇼킹한 주제를 다루어 인지도를 높여 갔다. AIDS 행동가 데이비드 커비(David Kirby)의 병원 침대 사망 사진, 탯줄이 끊어지지 않은 신생아의 모습(<그림 6> 참조), 'HIV Positive' 문신을 한 남녀를 클로즈업 사진, 백인·흑인·황인종의 심장 사진(<그림 7> 참조), 로멘틱한 키스를 하고 있는 가톨릭 사제(Priest)와 수녀(Nun)의 사진(<그림 8> 참조) 등 사회적 주제를 가진 사진들에 베네통 로고를 구석에 배치함으로써 베네통이라는 브랜드를 각인시켰다.



이러한 충격적인 광고 사진을 통해 전 세계를 습격했고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러한 충격적인 광고 게재는 1985년 말 사진작가 올리비에 토스카니(Oliviero Toscani)를 예술감독(Art Director of Benetton)으로 영입하면서 시작했다. 올리비에는 “All The Colors In The World"라는 주제 하에 캠페인성 광고 사진을 찍어 세계에 공개함으로써 지속적으로 세계에 충격을 던졌다. 300만 달러를 투자한 캠페인성 메시지 광고는 유럽, 미국 등 전 세계에 베네통만의 이미지를 정착시키기 위함이었다. 


거기에 “United Colors of Benetton" 문구 아래 여러 인종의 모델들이 베네통 옷을 입고 환하게 웃는 베네통의 기본광고를 함께 배포하였다.(<그림 9> 참조) 베네통 광고에는 한국 모델로 홍진경, 김성희, 보아가 참여하였다.(<그림 10> 참조) 


 

 

<그림 9> 베네통 광고들

 

 

 

<그림 11> 베네통 광고의 홍진경과 보아


베네통의 모토인 컬러풀하고 밝고, 다인종적(multi-ethnic)이며, 젊음을 표상하는 광고를 전 세계에 뿌렸다. 이는 베네통 옷에는 인류 미래의 밝은 전망과 철학, 젊은이의 생활 스타일이 있음을 알리는 이미지 정착 방법이었다. 흔히 사진작가 올리비에로를 통해 베네통의 혼(魂)을 찾아 보여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광고를 통해 베네통은 다인종 공존, 평화, 환경보호, 인권 등의 사회적 메시지를 가진 제품 브랜드로 각인시켰다.(<그림 11> 참조)


<그림 11> 사회적 주제를 가진 베네통 사진 광고

 

이러한 광고들은 루치아노 베네통의 광고 전략에서 나온다. 우선 “단순히 제품만 팔지 않고 제품 뒤에 숨어 있는 기업 이미지를 팔려는” 노력으로 베네통 브랜드의 특징을 명확하게 소비자에게 각인시키고 또한 출시되는 모든 제품에 광고를 붙이게 되는 경우 들어가는 엄청난 광고비를 감당할 수 없고 또한 효과도 적기 때문에 브랜드 이미지 광고에 치중하는 것을 커뮤니케이션 전략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광고를 통해 베네통의 이념, 목표, 이미지와 제품 자체를 뒷받침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으로 타 기업과 차별화를 꾀하고자 했던 루치아노 베네통의 광고 전략에 근거한 것이었다.


베네통의 광고 전략에 관하여 루치아노 베네통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말씀하신 대로 (베네통에는) 여러 브랜드가 있는데, 어패럴 쪽은 '베네통’과 '시슬리’라는 두 브랜드가 있습니다. 베네통 안에서도 상표는 같지만 품질 구성도 다양하고 여성복, 남성복, 아동복 등으로도 나뉘어 있어요. 스포츠용품 브랜드도 있고요...확실히 이렇게 브랜드가 많으면 각각의 브랜드에 광고 예산을 충분히 쓸 수 없으니까 개별 상품에 세계적인 광고를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취한 방법은 단일 브랜드의 광고가 아니라 기업 전체를 알리는 광고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단일 브랜드에 많은 광고 선전비를 들이지 않고 또 사람들이 “어, 베네통의 아이디어는 다르네”하고 생각할 수 있는 기업 이미지 광고를 만들어 나갔어요. 그것도 각각의 산하 기업이 그 기업 광고를 통해 힘을 얻고 또 서로 상승효과를 내는 광고로 매출을 올리고 그 매출로 각각의 회사가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도록 했어요.”(루치아노 베네통·후쿠하라 요시하루, 『베네통과 시세이도, 젊음에게 말한다』, 서울: 생각의 나무, 2003, pp.99-100. 강조는 필자가 한 것임.) 


5. before and after - 세상의 옷 색상과 매장 전신 방식을 바꾸다


베네통의 창업은 다양한 색상의 사용으로 옷 색깔의 자유를 가져왔고, 신비한 색상의 새로운 발견, 시대를 밝혀주는 젊은 활기를 전 세계에 제공한 역할을 했다. 또 '후염색’ 기술의 사용, 카운터를 없애 소비자에게 물건 '선택의 자유’를 찾아 주었다. 


매장 개혁을 어패럴 사업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보고 있다. 베네통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어패럴 업계는 이미 성숙 산업이라서 제품 분야에서의 새로운 발견은 앞으로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소재도 이제 거대한 개발 센터나 대기업의 방적 산업이 개발하는 것뿐이고 금방 다른 제조업자들도 사용하죠. 대기업이 만들면 많은 사람에게 팔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물건을 만든다는 건 실제로 매우 힘들어요. 성숙 산업인 어패럴 업계에서 타사보다 더 좋은 실적을 올리려면 매장 개혁을 진행하는 방법밖에 없어요. 이미 어디에서나 설비 자동화는 최대한 진행되고 있으니까요. 이런 매장은 본 적이 없다고 할 만큼 혁신적인 큰 매장을 만들고, 상품 그 자체보다도 디스플레이로 타사와 차별화시켜야 합니다. 제품 자체는 이제 성숙의 정점까지 와 있으니까요.” (강조는 필자가 한 것임.)


나아가 다인종 공존 이미지를 통한 '통합(united)' 정신을 세계에 전달하고 인종·문화를 뛰어 넘는 인간과 인간의 연대감을 제창하였다. 옷을 통한 진정한 세계화와 인종과 피부색을 뛰어 넘는 보편·통합 정신을 강조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United Colors of Benetton"을 지향했다고 하겠다.


베네통은 스웨터에서 니트웨어, 셔츠, 진, 구두 등으로 제품을 다양화했고, 금융업('인볼딩’)에까지 사업을 다각화했다. 또한 스포츠 웨어와 고급 의류(Sisley) 시장에 진출하여 새로운 의류사업 영역도 개척하였다. 


이 모든 것의 기본에는 참신한 제품, 참신한 디스플레이, 후염색 기술과 하청협력에 의한 참신한 생산체제 도입과 새로운 시장 진출이라는 기업가 루치아노 베네통의 창의적 사고가 있었다. 물론 더 근본에는 1945년 아버지를 여읜 매우 가난한 네 명의 이탈리아 아이들 - 루치아노 베네통 (10살), 줄리아나 (8살), 질베르토 (4살), 카를로 (1살) - 이 펼친 용기와 세상에 대한 도전의 결과이기도 하다. 20살의 형과 18살의 누나가 장사를 결심하고, 실행했고, 나머지 형제들이 모두 함께 뛰어들어 내리 일만하여 거둔 성공의 결과이기도 하다. 


루치아노는 다음과 같이 베네통의 과거를 회상했다.


“전설 속의 밀짚처럼 점차 (스웨터의) 털실은 황금으로 변해갔다. 그렇지만 마법 마차의 도움은 없었다. 자신들이 나아가는 길이 옳다고 굳게 믿은 일종의 영감에 탓을 뿐으로 마법 따위는 일절 없었다.”


베네통의 성공을 요약하면 창업자 루치아노 베네통이 창안한 '밝고 자유로운 색상의 사용’, '염색 시기의 자유로운 선택’, '고객의 선택의 자유 확보’가 핵심이었다. 이러한 요인들은 베네통 매력이었고 베네통 성공의 비결이었다. 전통적인 색을 고집하지 않고 새로운 색을 만들어 소비자를 매혹하고, 후염색법을 통해 신속한 대처로 계절마다 다른 유행의 컬러를 얼마든지 빠르게 준비하게 되고, 오픈 공간에서 보거나 만져보며 심리적으로 내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해서 그 황홀감을 실현하게 하는 방식의 도입으로 베네통은 국내, 국제 경쟁력을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 베네통은 과거의 성장이 멈추고, 2000~2010년 10년간 2% 미만의 매출 증가에 머물렀다. 일종의 정체기인데 자라(스페인)와 H&M(스웨덴)의 매출이 같은 기간 4배와 6배 신장한 것을 고려한다면 베네통의 후퇴기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베네통의 시가 총액은 2000년 42억 유로(Euro)에서 2011년 6억 9000만 유로로 줄어들었다. 디자인이 늦어지고, 유통망에 문제가 있으며, 저가의 제품을 원하는 소비자 욕구를 충족하지 못하고 있고 또한 유로존 부채위기에 있는 이탈리아의 매출이 48%나 의존하기 때문이다. 베네통의 최근 부진에 대해 1986년부터 2000년까지 사진작가 올리비에 토스카니의 주도로 발표된 사회적 주제의 사진들이 소비자들에게 “세상은 모두 잘못 되었다”라는 메시지를 주어 베네통에 대한 지겨움을 불러일으키고 발랄한 이미지와 갈등을 일으켜 외면을 받게 되었다고 지적하는 비판도 있다. 


현재 베네통은 루치아노의 차남 알렉산드로 베네통이 부회장으로 경영의 전면에 나서고 있고, 장남 마우로는 시슬리(Sisley)라는 여성복 브랜드를 이끌며 재도약을 진행하고 있다.  



<참고문헌>


루치아노 베네통. 백창현 역. 『베네통 이야기』. 서울: 명진출판. 1995.

루치아노 베네통·후쿠하라 요시하루. 『베네통과 시세이도, 젊음에게 말한다』. 서울: 생각의 나무. 2003.

조윤미. “알레산드로 베네통 부회장 '브랜드 강화와 활성화 필요하다’”. 『아시아경제』. 2011년 11월 18일.


베네통 홈페이지. https://www.benetton.com/

한국 베네통 홈페이지. http://www.benettonkorea.co.kr/

https://en.m.wikipedia.org. 접속일: 2016년 12월 3일.


김인영│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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