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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공단·파독·파병·평화시장…한강의 기적 의미 되찾기

현진권 | 2016-12-07 | 조회수: 162       미디어펜
2016년 대한민국의 경제 수준은 어느 정도에 와있을까. 2016년 IMF발표 기준으로 세계11위이다. 면적 세계 109위, 인구 세계 26위의 규모에 비하면 매우 선전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짧은 시간 이렇게 압축적인 성장을 할 수 있었던 요인을 우리는 피땀 흘려 가족을 먹여 살리고자 했던 윗세대들의 눈물 나는 노력과 희생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에서는 어려웠던 시절 삶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발버둥 쳤던 개인들의 삶을 보다 자세히 재조명하고, 피나는 성장의 과정에서 우리가 겪었던 여러 역사적 사건들이 과연 경제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하나씩 되짚어보고자 한다. 

파독: 빈곤으로부터의 탈출을 시작하다

6.25 전쟁 이후 한국의 경제상황은 비참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은 60~70달러 수준으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에서 독립한 125개 국가 중에서도 최하위 국가에 속했으며 전체 노동력의 60%가 농업에 종사했지만 생산성은 극히 낮았던 상황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최대 관심사는 경제를 발전시키고 실업을 해소하는 일이었다.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세웠지만 자원도 빈약하고 자본도 없는 나라에서 경제개발은 난제 중의 난제가 아닐 수 없었다. 경제개발 계획 수행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고자 하는 노력도 국내외에서 모두 실패로 끝났다. 고소득층의 유휴자금을 끌어내기 위해 화폐개혁을 단행했지만 예상만큼 숨겨져 있던 돈이 많지 않아 실패했으며 미국으로부터 외면당했다. 국교정상화가 되지 않은 일본으로부터의 외자도입도 기대하기 어려웠던 상황이었다.

이런 난국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서독으로 눈을 돌렸다. 분단국가라는 공통점 외에도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서독은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우위성을 잘 입증해 줄 수 있는 모델이었다. 1963년 12월 21일 제1진 247명이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서독으로 향했다. 이후 1977년까지 7936명의 광부가 파견되었고 1966~1976년까지 약 1만여 명의 간호사와 간호조무사가 서독에 근로자로 파견되었다. 

독일로 간 광부와 간호사들은 많은 고생을 하였다. 광부들은 40도씨를 넘나드는 지하 1천 미터 막장에서 채탄을 했고 간호사들은 시체 닦는 일부터 해서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다. 광부들은 거의 매일 2~3명씩 막장에서 부상을 당했다. 다른 나라의 근로자들은 못 견디고 달아났지만 우리나라의 근로자들은 묵묵히 견뎠다. 그만큼 가난에서 벗어나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절박함이 컸던 것이다. 

영화 ‘국제시장’에는 당시 이러한 절박함이 잘 드러나 있다. 주인공 ‘덕수’는 동생의 대학 학자금 마련을 위해 서독에서는 광부 생활을 하고 이후에는 또 여동생의 결혼자금 마련을 위해 베트남으로 간다. 이렇게 눈물로 시작된 파독근로는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밀알이 되었다. 아래 <표 1>은 파독근로자들이 국내로 송금한 외화의 기여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 표 1. 파독근로자의 송금의 경제성장 기여도./자료 출처: 김수용, 1983.(독일 아리랑에서 재인용)


이들의 송금은 가계의 소비와 저축을 늘렸고, 소비의 증가는 각종 소비재산업의 생산 증대를 유발했다. 또 저축의 증대는 부족한 투자 재원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생산력을 증대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부족한 외화보유고를 늘렸고 새로운 투자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경제성장의 동력을 확보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한 것이다. 또한 파독은 이후 이어지는 월남파병과 근로자 파견, 1970년대의 중동 특수 등으로 이어지는 해외진출을 통한 경제발전의 시발점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1964년 서독을 방문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파독 근로자들과의 만남의 자리에서 이런 격려사를 하였다. “우리가 잘 산다면 왜 여러분이 부모형제를 저버리고 이역만리인 이곳에서 노동을 하게끔 하겠습니까. 우리도 남의 나라 못지않게 잘 살기 위해서 피와 땀을 흘려서 부강한 나라를 이룩해서 우리의 자손에게는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설움을 남겨주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은 물론 모든 근로자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베트남 파병: 경제기적의 도화선이 되다

한국은 파독에 이어 베트남 파병이라는 중대한 기점을 지나게 된다. 한국군의 베트남(월남) 파병은 건군 이후 최초의 해외파병이었다. 64년 9월부터 휴전협정이 조인되는 73년 3월까지 8년 6개월 동안 총 32만 4864명의 병력이 투입됐다. 앞서 말했듯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 역시 민간인 신분으로 베트남에 들어가 생사를 넘나드는 고초를 겪는다. 군인뿐만 아니라 민간인까지 목숨을 걸고 베트남에 갔던 이유는 무엇이었으며 월남 파병은 대한민국 경제에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월남파병은 경제적인 요인뿐 아니라, 정치/군사적인 측면에서도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보는 의견이 많다. 미국은 월남전에 참전하면서 주한미군을 베트남으로 빼내려고 했다. 1960년대 중반까지 국방비의 73%를 미국의 원조로 충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도움 없이는 국방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또한 주한미군의 부재는 북한의 남침으로 직결될 가능성이 높았다. 안보상 주한미군은 필수불가결한 존재였으며 정치·외교적 측면에서도 6.25 전쟁 당시 참전했던 미국과의 관계 유지에 필요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정부 수립 이래 대한민국은 재정의 상당부분을 미국의 무상원조에 의존했다. 한국은 1945년부터 1962년까지 약 17년간 총액 31억여 달러의 미국원조를 받는다. 그러나 1958년을 기점으로 미국의 국제수지가 사상 처음으로 적자를 기록하고 해외에 방출한 달러가 미국의 금보유량에 육박하게 되자 미국은 국제수지대책의 일환으로 개도국에 대한 무상원조를 유상원조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지정학적인 위치 등의 이유로 단일국가로서는 가장 많은 무상원조를 받고 있던 한국도 여기서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연간 2~3억 달러 수준이던 미국의 원조가 6.25전쟁 이후 최저수준인 1억 2천만 달러까지 감소하면서 한국경제는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은 베트남전 파병의 특수효과를 꾀함으로써 경제적 난관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한국군은 국내에서 불과 1달러 60센트의 월급을 받았지만 파병되었을 경우 평균 40달러 이상의 월급을 받았다. 한국군은 사령부가 직접 군인들의 봉급을 관리, 본국으로 송금시켜 저축률과 외환보유고를 늘려갔다. 또한 영화 ‘국제시장’의 덕수처럼 베트남에는 군인뿐만 기술근로자 약 56,000여명이 파견되었으며 이들이 베트남에서 벌어들인 외화는 1972년까지 총 1억 6,600만 달러였다. 이들 근로자들이 귀국할 때 평균 저축액이 5천 달러에서 8천 달러였으며, 1만 달러 이상을 저축한 사람도 상당수 있었다고 한다.

  
▲ 광부와 간호사들은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 열심히 외화를 벌고, 군인과 기술자들이 베트남으로 가 있을 당시 한국에는 1호 수출산업공단인 구로공단이 생겨났다. 사진은 독일 탄광박물관 전경./사진=미디어펜
    
베트남 파병으로 인한 새로운 수출시장의 확보는 우리 경제성장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1963년 630만 달러에 불과하던 수출액이 3년 만에 4배에 가까운 2,360만 달러에 이르게 된다. 베트남 파병은 대 베트남 수출만 증가시킨 것이 아니다. 대미 수출증가율은 68.6%를 기록하였다. 당시 대미 수출이 급격히 증가한 것은 미국이 베트남 파병 요구에 응했던 한국에게만 독점적으로 부여했던 우호적인 수출조건, 즉 보답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대미수출은 1964년 약 3,600만 달러에서 1972년 7억 6,000만 달러로 21배 증가했다. 

국내 기업들의 베트남 진출은 이후 대기업 형성의 기초가 되기도 했다. 당시 베트남에 진출했던 현대건설, 한진상사 등이 베트남에서 자본축적의 기회를 잡았다. 현대건설은 베트남 항만공사에 참여하여 큰 부를 축적하면서 한국 건설업계 1위로 도약하였고 여기서 축적한 기술력은 이후 중동건설 진출에 큰 힘이 되었다. 

베트남 파병 결정, 그로인한 특수로 인해 대한민국 경제는 경제기적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경이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 파독이 경제발전의 시발점이었다고 한다면 베트남 파병은 경제기적의 도화선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베트남 파병 전과 후를 비교해보면 1963년을 기준으로 할 때 파병 마지막인 1973년까지, 즉 10년 만에 1인당 국민소득은 약 4배, 국민총생산액은 11배, 그리고 총 수출액은 37배나 증가했다. 

구로공단: 수출액 100억불 달성하게 한 산업역군

광부와 간호사들은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 열심히 외화를 벌고, 군인과 기술자들이 베트남으로 가 있을 당시 한국에는 1호 수출산업공단인 구로공단이 생겨났다. 1960년대 저렴한 노동력을 무기로 삼아 국제 비교우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정부는 경공업 육성전약을 세웠고, 이에 따라 노동력 확보가 용이하고 다양한 자원이 집중되어 있는 구로동에 1964년 4월 한국수출공단 제1단지를 지정하였다.

구로공단은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냈다. 농촌의 처녀 총각들, 심지어는 10대 소년 소녀들도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상경하기 시작했다. 근로자의 70%가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딸로 태어나 돈을 벌기 위해 서울 공장에 취직한 것이다. 이들의 삶은 열악했으나 10대 소년 소녀들과 청년들이 벌어서 고향집에 보낸 돈은 동생들을 공부시키고 소와 돼지를 사서 키우는데 이바지 했다. 게다가 수출 산업의 역군으로서 조국 근대화에 헌신한 자랑스러운 아들딸들이었다. 

1967년 구로공단이 출범할 당시 대한민국의 수출액은 3억 2000만 달러였다. 그 후 10년이 지나고 수출액 100억 달러를 달성했다. 수출 품목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던 것이 섬유·의류·봉제, 전기·전자조립 가발과 잡화였는데 이것들이 바로 1970년대 구로공단의 주력 업종이었으니 구로공단의 근로자들의 기여한 바가 지극히 크다고 할 수 있다.

혼자서는 사글세도 감당키 어려워 2평 남짓한 단칸방에 모여 살았던 어린 여공들의 삶은 그 누구보다 치열했다. 공장에서 일하기에 ‘공순이’, ‘공돌이’로 불렸던 구로공단의 노동자들. 그들의 스스로 일어서려는 치열한 의지가 있었기에 대한민국은 번성한 나라가 되었다. 또한 그러므로 구로공단의 근로자들의 희생은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뿌리로써 평가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 베트남으로 간 군인들과 기술자들, 중동의 열사들, 구로공단과 평화시장의 여공들과 강원도 태백 광부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족에 대한 헌신과 책임감이 탁월했다. 이들은 애국심이라는 거창한 구호보다는 안정된 소득, 사익을 추구했다./사진=영화 국제시장 스틸컷

중동 근로자: ‘의지의 한국인’

1960년대 수출주도적 성장을 추구하고 있던 한국이었지만 월남에서 전투병력이 철수하고 휴전협정이 된 1973년 갑자기 불어 닥친 오일쇼크는 큰 경제적 위기를 불러왔다. 국제 원유가격이 4배 가까이 인상되었고 국내 물가는 두 배로 올랐다. 국제적인 경기침체로 수출이 위축되어 달러 유입은 줄어든 반면에 해외에 지불해야 할 원유대금이 급증하면서 외환위기에 봉착했다. 겨우 이 위기를 수습한지 얼마 되지 않아 5년 후인 1978년에는 제 2차 오일쇼크가 발생했다. 그런데 한국은 이러한 두 차례의 오일 쇼크를 잘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기회로 삼아 1980년대에 고도성장을 이룩했다. 한국의 건설업이 중동건설시장에 진출해서 많은 회화를 벌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일쇼크로 세계는 인플레이션과 경기침체를 경험하면서 스테그플레이션이 발생했지만, 중동지역은 원유가 인상으로 인해 매년 700~800억 달러 규모의 외화가 유입되었다. 이는 중동지역에 낙후된 경제·사회개발에 착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1970년 당시 중동지역은 경제개발에 필요한 기술과 사회기반시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외국의 인력과 기술 그리고 물자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월남 패망으로 철수한 건설업체들을 비롯하여 한국의 건설업체는 이것을 천재일우의 기회로 판단하여 경쟁적으로 중동에 진출했다. 

중동진출은 1973년 삼환기업이 2400만 달러 규모의 사우디아라비아 고속도로 건설 공사를 맡으며 시작되었고 이어 1976년 현대건설이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지역에 9억 4500만 달러 규모의 항만 공사를 맡아 호황기를 맞게 된다. 삼환기업은 1974년에 제다 시(市)의 미화공사를 했는데, 착공한 지 한 달여 정도 지난 9월에 12월 말까지 공사를 끝내달라는 요청을 받고 횃불로 야간 공사를 강행했다. 사우디의 국왕은 이를 보고 크게 감탄했으며 이는 ‘횃불 신화’로 남아있다. 
 
중동지역에서의 건설 수주액은 1975년 이후 급격히 증가하여 1975년에는 전넨 대비 3배가 넘는 8억 1,478만 달러를 해외에서 수주했으며 1976년에는 더욱 크게 증가해서 중동에서만 약 25억 3천만 달러를 수주했다. 1977년에는 이 덕으로 경상수지가 흑자로 전환되었다. 

1977년 중동진출에 대한 성과보고 후에 오찬 석상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당시 현대건설의 정주영 회장에게 중동에서의 성공요인을 묻자 정회장은 “각하! 제가 공부를 제대로 했습니까, 대학을 나왔습니까, 영어를 할 줄 압니까? 그리고 현대 간부가 세계 일류의 외국회사에 비해 기술이나 경영면에서 우수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저나 회사 간부가 잘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현대가 잘 한다는 것은 우리나라 근로자가 열심히 일하고 성실히 일한다는 뜻입니다. 전적으로 근로자의 공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동안 한국 경제성장의 원인을 분석할 때 지나치게 정부주도적이어서 성공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지구상의 대부분의 정부주도적 성장을 추진한 나라들은 실패했다. 한국은 정부가 주도했지만 그 방법이 시장경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경쟁의 원칙을 지켰기 때문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또한 우리나라 기업들과 근로자들은 혼연일체가 되어 돈벌이에 힘썼다. 나라가 자신의 경제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아 ‘내 가정은 내 스스로 지킨다’라는 자조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6.25 전쟁 이후 한국의 경제상황은 비참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은 60~70달러 수준으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에서 독립한 125개 국가 중에서도 최하위 국가에 속했으며 전체 노동력의 60%가 농업에 종사했지만 생산성은 극히 낮았던 상황이었다./사진=연합뉴스

평화시장: 대한민국 빈곤탈출의 역사

앞서 말했던 구로공단의 근로자들과 같이 재조명되어야 할 사람들이 있다. 동대문 평화시장의 사람들이다. 평화시장은 6.25전쟁 당시 남한으로 내려온 북한 피난민들이 이 지역에서 미싱 한 두 대로 옷을 만들거나 미군복을 염색, 탈색하여 판매하던 것이 모태가 되었다. 판자촌으로 출발한 평화시장은 6.25전쟁 이후 청계천변에 노점상들이 대거 몰려들면서 본격적인 상권이 형성되었다.1958년 이 일대에 화재가 난후 판자촌들은 사라졌고 1962년 지금의 현대식 건물이 들어섰다. 1958년을 기점으로 현재 3개 층의 매장, 2070개의 점포, 5300여명이 종사하는 ‘평화시장(주)’이 56년째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평화시장은 ‘성장’이나 ‘발전’의 의미보다는 저임과 착취의 대명사가 됐다. 평화시장은 전태일 열사의 분신 현장이기도 하다. 평화시장은 노동운동의 시발점이 되었지만 반면 노동운동의 성지라는 이유로 다른 측면은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70년대에는 노조활동이 제약되어 저임금일 수 있었다. 하지만 전태일 열사 이후 그리고 1987년의 87체제 이후 노조활동은 만개했다. 그렇다면 평화시장 노조원의 살림형편은 크게 나아졌어야 한다. 하지만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노조가 안정된 일자리와 소득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다. 

평화시장의 여공은 피해자일 뿐인가. 아니다. 1966년 평화시장의 ‘시다’로 서울 생활을 시작한 신순애 씨의 기록에 따르면 신씨는 시다월급으로 700원을 받았고 2년 반뒤에 ‘미싱보조’로 승진한 뒤엔 월급이 3000원으로 올랐다. 월급이 3000원으로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봉제시장 자체가 커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당시 평화시장 여공들은 여전히 빈곤선 아래에 위치해 있었다. 하지만 최소한 점차 빈곤선의 ‘유리 천장’을 향해 올라오고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저임금과 복지의 미(未)적용지대인 평화시장에서도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흘린 어린 여공들의 땀과 눈물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번영의 일부를 설명하고 있다.  

  
▲ 1964년 서독을 방문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파독 근로자들과의 만남의 자리에서 "우리가 잘 산다면 왜 여러분이 부모형제를 저버리고 이역만리인 이곳에서 노동을 하게끔 하겠습니까. 우리도 남의 나라 못지않게 잘 살기 위해서 피와 땀을 흘려서 부강한 나라를 이룩해서 우리의 자손에게는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설움을 남겨주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마도로스: 경제발전의 숨은 주역

자본에 비해 노동이 풍부해 자본은 귀한 대접을 받고 노동은 그렇지 못했던 과거의 한국. 노동의 값이 너무 싼 나머지 평화시장 여공의 삶이 그리 팍팍했듯이 당시를 살았던 개인들은 먹고 살기 위한 수단으로 타국에서 힘들고 험한 일을 자처했다. 사람만 많고 일자리는 없었던 과거, 산업기반이 부족해 기업들이 일자리를 만들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독일과 베트남, 중동으로 떠났던 근로자들처럼 가족을 위해 개인을 희생했던 사람들 중 하나가 바로 ‘마도로스’이다. 마도로스-외항선원의 월급은 3만 7천~4만 원선이었다. 9급 공무원 월급이 5천원이었던 시기다. 맞벌이 부부가 10년 일해야 살 수 있는 아파트를 외항선원으로 1년만 고생하면 살 수 있었다. 당시 부산에서는 ‘배를 타면 가문을 살린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한국인들의 성실함과 악바리 근성은 외국에서 인정을 받았고, 한국 선원을 선호하는 회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당시 그리스, 미국 등 선원부족 현상에 시달리던 국가에서는 적극적으로 한국 선원을 받았다. 그들은 폐선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해적들을 피해가며 약속한 기간 안에 화물을 양하 하였다. 미사일이 날아다니는 이라크·이란 전쟁 중에도 배를 탔다. 하역 도중 기중기에 팔이 잘리고, 바람에 날리는 로프에 목이 감기는 사태가 비일비재했다. 선원들은 1년에 한번 집에 돌아갈 수 있었고 한번 갈 때마다 자식들은 훌쩍 커있었다. 이렇게 마도로스들은 거친 파도뿐만 아니라 외로움, 그리움과 싸우며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목숨을 걸고 배를 탔다. 

선원수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65년 우리나라의 총수출액은 5억 달러 정도였다. 이중 2000만 달러는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한 양곡수입에 사용됐다. 같은 해 해외취업 선원의 수입이 150만 달러였던 것을 감안하면 우리나라 양곡수입액의 10% 가까이를 선원들이 벌어들인 셈이다.

외화가득액을 기준으로 보면 송출선원들은 파독근로자보다도 경제적으로 더 큰 기여를 했다. 파독근로자가 1964년부터 1975년까지 송금한 외화는 1억 128만 달러였다. 비슷한 기간인 1967년부터 1978년까지 송출선원들이 송금한 외화는 4억 3,937만 달러였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송금한 금액의 4배에 달한다.     

태백 광부: 막장인생에서 산업전사로

1980년대까지 광산지역은 큰 호황을 누렸다. 7,80년대 광부는 고소득 직종이었으며 복지수준도 상당했다. 이 때문에 ‘검은 노다지’ 땅으로 사람들이 너도나도 몰려들었다. 광부와 그의 가족들로 인해 태백의 인구는 한때 12만 명에 달할 정도였다. 지금은 4만 7천명 수준이다. 광부들의 넉넉한 주머니 사정 덕에 탄광지역 주변으로 극장, 술집, 다방 들이 빽빽이 들어섰다. 광부들의 월급날이 되면 태백 철암역 주변은 불야성을 이루었다. 광부들의 월급이 다른 직업보다 월등히 높았던 것은 목숨을 보장할 수 없는 위험한 근무 환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막장은 석탄을 캐는 갱도의 막다른 곳을 뜻하는 말로, 흔히 막장인생이라고 하면 갈 데까지 다 간 절망스러운 상황을 의미한다. 광부들은 빛 한줄기 들어오지 않는 막장에서 석탄가루를 마시며 일해야 했다. 그들은 해수면보다 싶은 탄광 내에서 ‘언제 갱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하루 종일 느끼며 점심마다 탄가루가 섞인 한줄 김밥과 주먹밥으로 끼니를 때웠다.

광부들이 캔 석탄은 경제발전의 원료가 되었다. 세계적으로 석탄과 같은 지하자원의 채굴은 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는 계기가 되어 왔다.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차가 촉매제가 된 영국의 산업혁명 역시 주요 연로는 석탄이었다. 증기기관차의 발명은 석탄의 수요를 증가시켰고 석탄생산과 수송의 효율성을 높였으며, 그 결과 영국은 산업혁명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었다. 1848년 미국 서부에서는 그 지역에서 금이 발견되자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인구가 1만 5천명에 불과했던 캘리포니아는 1952년 25만 명의 인구를 가진 대도시로 성장했다. 한국에서도 광업은 한국전쟁 이후 세계 최빈국이자 농업국이었던 대한민국이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 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정부가 경제발전을 위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지하자원을 적극 개발했고 1950년대 텅스텐, 흑연, 고령토, 무연탄 등의 지하자원은 해외로 수출돼 외화획득에 큰 기여를 했다. 

광업이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면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역사가 보인다. 1955년 전체 GDP 대비 1.9%였던 광업의 비중은 1965년 3.6%까지 증가했다. 즉, 1950년대까지 농업사회였던 대한민국이 지하자원 개발을 시작으로 산업사회로 변모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지금이야 높은 인건비 때문에 석탄을 수입해서 사용하지만 당시에 석탄과 석탄을 캐는 광부는 꼭 필요한 존재였던 것이다. 광부들은 가족을 돌보고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해 기꺼이 ‘검은눈물’을 흘리며 그들의 삶을 캐내었다. 그리고 이들의 피와 땀이 모여 대한민국 가난한 서민들의 따뜻한 아랫목이 되었고, 석유를 수입할 달러가 없던 시절 경제발전의 기틀이 되었다.

  
▲ 대한민국의 경제 규모는 2016년 IMF발표 기준에 의하면 세계11위다. 국토 면적은 세계 109위, 인구는 세계 26위 규모다./사진=연합뉴스

나가며

앞서 말한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 베트남으로 간 군인들과 기술자들, 중동의 열사들, 구로공단과 평화시장의 여공들과 강원도 태백 광부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훌륭한 산업역군으로 남았다. 그들에게는 대한민국의 경제를 발전시키겠다는 애국심이나 시대적 사명이라는 거창한 구호보다는 안정된 소득이 절실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가족에 대한 헌신과 책임감이 모여 ‘한강의 기적’과 ‘대한민국 성공신화’를 이루었다. 이것은 애덤 스미스가 말했던 ‘자유로운 사익추구가 곧 공익, 국가의 부로 이어진다’는 메시지와 닿아있다.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가는 개인들이 모여 경제발전의 씨앗이 되었던 것이다. /현진권 자유경제원 원장


(이 글은 7일 자유경제원이 리버티홀에서 개최한 ‘경제발전의 뿌리를 찾아서: 빈곤으로부터의 탈출’ 연속세미나에서 현진권 자유경제원 원장이 발표한 발제문 전문이다.)

[현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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