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무원, 옛날 우리 두부를 부활시켜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먹을거리 시장을 열다

남정욱 / 2015-12-04 / 조회: 8,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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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먹는 것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알려준다. 생명은 소중하다. 아무리 하찮은 미물도 생명이 있으면 아름답다. 소중한 생명이기에 소중한 것을 먹어야 한다. 무엇을 먹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배를 채울까 걱정하던 민족이 있었다. 무엇이든 먹었다. 60년대까지 한국 경제는 채집 경제였다. 풀뿌리를 뜯어먹었다. 아카시아 꽃을 먹었다. 꽃술을 빨아먹었다. 개구리 다리를 튀겨 먹었다. 도시락 반찬이 볶은 메뚜기였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건강식이다. 그러나 그걸 일부러 찾아서 골라 먹는 것과 그것 밖에 없어서 그걸 먹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다. 70년대 중반부터 살림살이가 조금 나아졌다. 밀가루를 먹었다. 라면을 먹었다. 공장에서 만들어 낸 화학제품인지 먹을거리인지 구분이 애매한 것을 먹었다. 80년대 들어 경제성장에 불이 붙었고 건강하고 좋은 먹을거리를 비싼 가격으로 구매해 줄 수 있는 소비자층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여기에 착안해 유기농산물을 경작하고 이를 시장에 내다팔기 시작한 사람이 원혜영이다. 보통은 원혜영에 대해 풀무원을 창업한 원경선의 사업을 이어받은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과 다르다. 그의 아버지는 공동체 운동을 하던 농부였고 우리가 알고 있는 식품회사 풀무원은 원혜영이 창업했다. 1981년의 일이다.   

 

알제리 출신의 프랑스인 피에르 라비의 <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를 접한 1914년생인 원경선은 평생을 농부로 살기로 결심했으며 생명을 살리고 농사를 짓고 그것을 세상에 설파하고 기아를 극복하는 길을 찾는 이 모든 방법이 공동체에 있다고 믿었다. 원경선이 피에르 라비에게 빚진 것은 하나 더 있다. 풀무원이라는 이름이다. 피에르 라비의 아버지는 대장장이였다. 쇠를 달구거나 녹이기 위해 불을 지필 때 사용하는 기구가 풀무다. 그리고 쓸모없는 쇠를 용도가 있는 연장으로 만드는 일이 풀무질이다. 원경선은 인간에게도 풀무질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는 부천에 농장을 열면서 이름을 풀무원이라고 지었다. 원혜영이 가업을 물려받은 것으로 오해받은 이유다. 피에르 라비는 원경선보다 어린 1938년생이다. 어린 사람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는 말은 이래서 있는 것이다.

 

원혜영은 1951년 9월 27일에 태어났다. 그의 할머니는 원혜영을 사내아이의 평안도 사투리인 ‘스난아이’라고 불렀다. 원혜영은 중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복고등학교에 진학한다. 그곳에서 그는 평생의 동지이자 지금의 풀무원 사장인 남승우를 만난다. 남승우는 4당5락으로도 부족해 3당4락의 정신으로 잠 쫒는 약까지 먹어가며 공부한 독한 인간이다. 1971년 원혜영은 서울대 사대 역사교육과에 입학한다. 이후의 일은 많이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논의와 무관하여 생략한다.

 

도피생활, 아내의 해직으로 고민 끝에 창업한 풀무원 식품

 

다시 식품회사 풀무원으로 돌아가자. 술 마시는 걸 좋아하지만 사람들과 어울려 마시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 보통은 집에서 내자와 마신다. 이때 주로 올라오는 안주가 김치찜과 두부인데 두부만은 꼭 풀무원 두부를 먹는다. 소주를 마신다는 것은 몸에 화학물질을 들이붓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안주라도 좋은 걸 먹자는 갸륵한 발상이다. 이렇게 몸에 좋은, 안심하고 먹어도 되는 먹을거리의 존재를 소비자에게 처음 소개하고 정착시킨 게 원혜영이고 풀무원 식품이다. 유기농이라는 말조차 어려워 처음에는 ‘무공해 농산물’이라고 불렀다.

 

두부와 콩나물은 전통의 식탁 강자다. 가난한 집이건 부잣집이건 두부와 콩나물은 공집합이다. 압구정동에 처음 유기농산물 판매장을 열었던 원혜영은 두부와 콩나물 같은 가공식품도 안심하고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가게를 찾은 손님들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이전까지 두부는 수입 콩으로 만들었다. 그러다보니 장거리 해상운송을 해오는 동안 부패를 막기 위해 방부제와 살충제처리를 해야만 했다. 그동안 우리는 미량의 방부제와 살충제를 규칙적으로 장복해 온 셈이다. 수입 콩에 콩기름을 짜고 난 찌꺼기인 대두박大豆粕을 섞어 만드는 건 부록이다. 콩나물도 마찬가지였다. 비위생의 대명사였다. 비위생 콩나물 공장의 적발 소식은 T. V 뉴스의 단골 보도였다. 불결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방부제를 탄 물에서 기르기도 했고 통통하게 만들겠다며 성장촉진제를 쓰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그 시절 하루 식사에서 방부제와 살충제와 성장촉진제를 골고루 먹었다. 원혜영은 무공해 콩나물과 두부를 만들어 팔기로 결정한다. 제품의 콘셉트는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식품’이었다. 

 

세 배나 비싼 가격, 팔릴까

 

문제는 가격이었다. 유기농 축산물이 수급 불안정이라는 구조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면 두부와 콩나물은 높은 원가에 따른 비싼 가격이 발목을 잡았다. 자연성과 안정성의 원칙을 따르다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는데 가격이 기존 제품의 무려 세 배였다. 콩나물 값을 깎는 주부가 알뜰 주부 소리를 듣던 시절이다. 이 계산법으로는 답이 안 나온다. 팔리면 기적이고 더 이상한 일이다. 그래서 자문을 구한 게 현재 CJ의 마케팅 전문가인 김진수다. 김진수는, 초기에는 그 상품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특정 소비층을 상대로 소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일점一点 집중주의’ 기법이다. 그의 말에 따라 원혜영은 판매지점을 여의도나 강남 등 고소득고소비 계층이 거주하는  지역에 열었다. 백화점도 롯데, 신세계 그리고 그 이름도 그리운 한양쇼핑센터(지금의 갤러리아 백화점 자리다)에서도 팔았다. 서민 음식의 대명사인 두부와 콩나물이 백화점에서 팔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매대의 앞자리를 떡 하니 차지하고. 한 가지 잊은 게 잊는데 안주로 풀무원 두부를 고집하는 또 다른 이유는 맛이 있기 때문이다. 원혜영은 자기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100퍼센트 우리 콩으로 만든 두부는 몇 년 묵은 수입 콩에 대두박을 섞어 만든 일반 두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맛있었다. 지금도 시제품을 먹었을 때의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고소하고 부드러웠다. 시식을 한 사람들 모두 옛날 우리 두부가 부활했다고 말했다. 콩나물도 마찬가지였다. 성장촉진제를 쓰면 빨리 굵고 커지는 대신 맛이 싱거운데 물만 주고 기른 자연재배 콩나물은 더디게 자라고 작지만 고소한 맛은 훨씬 더 했다. 안전성에 맛까지 뛰어난 두부와 콩나물의 출시는 그 성공을 예감하기에 충분했다.” - <아버지, 참 좋았다> 중 p 158에서 인용 -

 

쌀농사와 달리 콩, 팥 등 밭작물들은 농약을 쓰지 않는다. 원료 확보가 용이하다는 뜻이다. 원혜영은 이때 ‘쌀과 채소는 국산 유기농, 잡곡은 국산’이라는 모토를 세운다. 초기 풀무원 식품의 원칙이다. 콩나물은 집에서 키워도 됐지만 두부는 정식으로 제조 허가를 받은  공장에서 생산해야 한다. 사업 초기에는 콩과 응고제를 가져가 시설만 빌렸다. 그의 아내가 불려 놓은 콩을 트럭에 싣고 원주로 날랐다.

 

먹을거리에서 포장이란 음식에서 접시의 역할과 같다


백화점에서 파는 자연재배 콩나물과 두부는 그 포장부터 달라야 했다. 이는 제품의 규격화가 필요한 당연한 이유이기도 했는데 당시 두부는 판째 놓고 한 모씩 잘라 파는 것이 보통이었다. 원혜영은 판을 없애고 물이 든 비닐봉지에 두부를 담아 팔았다. 보기에도 신기했던 물에 담긴 두부는 얼마 후에 지금의 플라스틱 용기도 바뀐다. 이제는 그렇지 않은 제품이 더 이상해 보인다. 콩나물도 나무통 째로 놓고 덜어서 파는 대신 일정량을 비닐봉지에 담아 포장해 팔았다. 시장에서 팔던 판에 담긴 두부와 콩나물에는 파리도 놀다가고 벌레도 함께 살고 그랬다. 먹을거리는 소중하고 깨끗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는 플라스틱 용기와 비닐봉지를 통해 설명했다. 판매처는 조금씩 늘었다. 양주의 풀무원 농장에 두부 공장과 콩나물 공장을 지었다. 자체 생산을 하게 되면서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고 품질관리에도 더 신경을 쓸 수 있게 되었다.

 

현재 풀무원은 한 해 1조 6,800억 원의 매출(2014년 기준)을 내는 거대한 기업으로 성장했다. 일본에서는 M&A를 성공적으로 완료했으며 출시되는 제품도 두부와 콩나물만이 아닌 건강식품, 음료, 면, 밥, 만두, 축산물, 양념, 간식, 화장품까지 다양하다. 이 모든 제품들을 소비자들은 ‘풀무원’이라는 이름을 믿고 구매한다. 원혜영은 이 부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1987년 풀무원 식품을 떠나 지금까지 20년 넘게 정치를 해왔지만 한국 정치사에 길이 남을 정도로 내세울만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한국식품사에는 큰  기여를 했다고 자부한다. 안전성을 식품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내세우면서 ‘안전한 식품’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었고 또한 풀무원식품을 자연과 생명을 중시하는 ‘믿을 수 있는 식품 브랜드’로 성장시켰다.  - <아버지, 참 좋았다> 중 p 172에서 인용 -

 

그의 말 대로다. 그가 ‘기업’인 풀무원에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공동체주의를 강요하고 기업에 반反시장적인 정서를 결합시켰다면 풀무원은 지금의 풀무원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원혜영은 1987년 풀무원 대표를 사임했다.

 

 

참고자료 : 아버지, 참 좋았다/원혜영/2010년/비타베아타 刊
                풀무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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